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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각집참회(懺悔)와 절개(節槪)

최고관리자님    작성일2020-05-18 19:39:54    395    0
참회(懺悔)와 절개(節槪)

 

내용

【요점】

오랫동안 길들여진 습관을 버리거나 고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쁜 습관일수록 더욱 그렇다. 『중경찬잡비유경(衆經撰雜譬喩經)』에 이에 대한 참으로 적절한 말씀이 있다.

【내용】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일이다.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7리(里) 쯤 떨어진 곳에 술을 좋아하는 노공(老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난(阿難)존자는 그를 깨우쳐주려 하였다.

「지금 부처님께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니 가서 친견하시지요.」

노공이 말했다.

「나도 부처님께서 근처에 계시다는 말씀은 들었소. 생각 같아서는 친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교묘히 오계(五戒)를 주시면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술을 못 마시는 것은 어린애가 젖을 얻지 못 함과 같습니다. 나는 이를 견딜 수 없기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고는 그날도 또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그리곤 날이 저물어 돌아오다 나무에 걸려 땅에 넘어졌다. 온 몸이 아팠다. 문득 스스로 말하기를,

「이런 고통이 어찌 유쾌한 일이랴. 아난존자가 항상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자고 했음에도 그 말을 듣지 않았는데 지금 몸의 고통이 말이 아니로구나.」하더니 집안사람들에게,

「나는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리라.」

집안 식구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평소 부처님께 가지 않으려 하더니 무슨 연유로 마음이 바뀌었는가.’ 하고. 말을 마친 노공은 기원정사로 달려갔다. 아난존자가 노공이 온 것을 보고 기뻐하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노공이라는 사람이 문 밖에서 뵙고자 하나이다.」

「노공은 혼자서 올 수 없느니라. 오백 마리의 흰 코끼리가 끌어서 온 것이니라.」

「오백 마리의 흰 코끼리 없이 혼자서 왔나이다.」

「그 코끼리들은 노공의 몸 안에 있느니라.」

아난존자는 노공을 부처님께 안내했다. 노공은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사뢰었다.

「부처님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말씀은 오래 전에 들었사오나 어리석은 소치로 일찍 뵙지 못하였나이다. 부디 제 잘못을 용서해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 노공에게 물으셨다.

「오백 수레의 섶을 모두 태워버리려면, 몇 수레의 불이 필요한가.」

「많은 불은 필요치 않습니다. 콩알만 한 불씨면 잠깐 사이에 모두 없앨 수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노공에게 물으셨다.

「노공의 옷은 입은 지 얼마나 되었는가.」

「일 년쯤 되었나이다.」

「그 옷을 빨아 때를 없애려면 몇 해나 걸리겠는가.」

「잿물 한 말이면 잠깐사이에 깨끗이 빨 수 있나이다.」

「노공이여! 네가 지었다고 하는 죄도 오백 수레의 섶과 같고, 일 년 동안 입은 옷의 때와 같으니라.」

노공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곧 오계를 받았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으로 일깨워주셨고, 노공은 곧 깨달아 아유월지(我唯越智=不退智)를 얻게 되었다. (주1)

<1> 희망의 노래 ‘멸죄게(滅罪偈)’!

위 내용과 절묘하게 일치하는 게송이 있으니 「천수경」의 ‘멸죄게’다. 이 게송은 『유가집요구아난다라니염구궤의경(瑜伽集要救阿難陀羅尼焰口軌儀經)』(주2)과 『유가집요염구시식의(瑜伽集要焰口施食儀)』(주3) 등에도 보인다.

百劫積集罪(백겁적집죄) 백겁도록 쌓고쌓여 태산같이 많은죄업
一念頓蕩除(일념돈탕제) 참회하는 일념중에 남김없이 사라짐이
如火焚枯草(여화분고초) 한점불꽃 마른섶을 순식간에 태움같아
滅盡無有餘(멸진무유여) 남김없이 소멸되어 흔적조차 없어지네.


담배와 술, 이성과 도박, 폭력과 거짓말… 나쁜 습관을 멀리하지 못해 애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스스로의 무력함을 탓하고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무력함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기에 부처님께서는 노공이 술을 끊는데 오백 마리의 흰 코끼리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하라는 말은 더욱 아니다. 사람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듯, 같은 이유로 참회도 가능함을 강조하고 싶어 꺼낸 말이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간의 잘못이 아무리 많더라도 콩알만 한 참회의 불씨 또는, 한 말의 잿물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육조스님께서는 참회를 정의하시면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참(懺)이라 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것이 회(悔)라고 한다 하셨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알고도 짐짓 범하면 산채로 아비지옥에 들어간다(知非故犯則生陷地獄)는 가슴 철렁하리만큼 냉혹한 말씀이다.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는 선연을 만났으니 용기를 내야한다. 노공(老公)처럼…

<2> 족제비의 절개(節槪)

조용한 산림(山林)이 갑자기 떠나갈 듯 요란하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무언가를 열심히 두드린다. 가재도구 가운데 두들길 만한 것은 모두 동원된 듯하다. 원을 그리듯 넓은 공간을 에워싸고 벌어지는 광경은 다름 아니라 족제비를 잡으려는 것이다. 족제비의 털은 황모(黃毛)라 하여 최상급 붓을 만드는데 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에워싼 원을 조금씩 좁혀 가는데, 이상한 것은 족제비가 달아날 수 있도록 한군데를 터놓았다는 점이다. 갑작스런 소란에 놀란 족제비는 사람들이 마련해준 고마운 탈출구(?)를 통해 달아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멈추고 만다. 장애물이 나타난 때문이다. 사실 장애물이라고는 했지만 족제비 입장에서 보면 별것도 아니다. 커다란 구덩이에 인분(人糞)이 잔뜩 들어있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족제비의 날랜 동작이라면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는 그런 장애물이다.

그런데도 족제비는 멈춰서고 만다. 천성이 워낙 깔끔해 결코 제 몸을 더럽히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지친 족제비는 크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힌다. 무리한 방법으로 잡으면 털을 못 쓰게 되는데, 유별나리만큼 청결을 유지하려는 족제비의 절개(?)를 사람들이 역이용한 것이다.

<3> 청중(淸衆)의 의미

세상에는 많은 단체가 있다. 공부를 위한 학교, 정치를 위한 정당, 사업을 위한 회사, 국토방위를 위한 군대, 외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수행을 위해 모인 승려들의 모임인 승가(僧伽)도 있다.

그런데 앞서 열거한 단체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단체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에 비해 승가는 인류 내지는 모든 중생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승가의 무리를 ‘청중(淸衆)’이라 부른다. 모든 단체 가운데 가장 수승하며 단연 모범적인 단체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들 구성원인 승려를 ‘중(衆)’이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칭찬해서 부르는 특허와도 같은 말이다.

딱한 것은 조선조 500년 동안 억불정책의 와중에서 숭고한 의미의 단어인 ‘중’이 오히려 승려를 하대하는 의미로 변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소위 어의전성(語義轉成)이다. 그 결과 스님들조차도 ‘중’이라는 소리를 비하하는 소리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님’자를 붙여 봐도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옳지 못한 정책의 해악이 정말 무섭다.

<4> 앉아서 받고 서서 파(破)할지라도…

현대는 어느 때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시대다. 그래서 말세(末世)라고는 하지만 연구와 수행이 자유로운 만큼 마음 놓고 정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선지식들께서 염려하신 말세의 증상 즉,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떨어져서 수행하는 이는 적고, 법등(法燈)은 쇠잔해져 도를 닦기보다는 교만과 시비에 휩쓸리는 일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앞서 ‘족제비의 절개’를 운운한 것도 자성(自省)의 거울로 삼고자 해서다. ‘승(僧)’자는 ‘亻+曾’으로 사람 가운데 좀 일찍 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수행자를 자처하면서 그 절개가 미물인 족제비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오늘이 있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든, 어떤 목적이 있었던 부처님의 제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은 선연(善緣) 중에 최대의 선연이다. 족제비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오욕(五慾)이란 오물을 묻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호흡에 달렸고 일어나고 스러짐은 거품과도 같나니, 가사를 입고 도리어 아비지옥에 들어갈 일을 하지 마라(死生在呼吸 起滅若浮漚 無令方服下 飜作阿鼻由)’(주4)고 하신 규봉(圭峰) 선사의 말씀을 우리 모두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대부분 전자의 죄가 더 무겁다고들 한다. 이른바 괘씸죄라는 것이 있어 가중처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무겁다고 한다. 이유인즉 잘못인 줄 모르면 고치려는 마음조차 갖지 않기 때문이란다. 즉, 알면 언젠가 고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르고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될까? 알고 짓는 죄의 결과가 그럴진대 짐작하는 일조차 두렵다.

그래서 옛 선사님들께서는 ‘계(戒)는 앉아서 받고 서서 파할지라도 받아야 한다.’고 강조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되새기거니와 계는 교통법규와 같은 것으로서 불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향해 가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음력 6월은 보살계(菩薩戒)를 받는 달이다. 보살계는 최고의 행복에 이르도록 아주 잘 짜여진 훌륭한 교통법규다. 삼국시대로부터의 일이다.

-주(註)-
(주1) 『衆經撰雜譬喩經』(大正藏 卷4 p. 541b)
(주2) 『大正藏』卷21 p.470c
(주3) 『大正藏』卷21 p.477c
(주4) 『緇門警訓』(大正藏, 卷48 p. 105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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