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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각집<대비주>와 『반야심경』의 어울림

최고관리자님    작성일2020-03-25 20:10:38    441    0
<대비주>와 『반야심경』의 어울림

 

내용

【요점】

1. 세 가지 진리 공제(空諦)·가제(假諦)·중제(中諦)
2. 좌익 <대비주(大悲呪)>와 우익 『반야심경』
3. 마지막 그 길에 지니고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4. 날개가 제 역할을 하려면…

【내용】

새에는 두 날개가 있다. 그렇다고 두 날개가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왼쪽 날개는 왼쪽으로 움직이고, 오른쪽 날개는 오른쪽으로 날아가려 한다. 그리고 이 두 힘은 균형을 이루며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느 한쪽이 없는 상황에서 나머지 한쪽만의 날개 짓은 의미가 없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데도 두 개의 날개가 필요하다. 자유와 평등이다. 이 가운데 우익(右翼)은 자유에 무게 중심을 둔다. 따라서 경쟁과 효율성, 능력에 따른 분배를 중시한다. 이에 비해 좌익(左翼)은 무게 중심을 평등에 두기에 경제적 약자에 대한 보호와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성향을 띤다. 결과 한쪽은 자본주의를, 다른 한쪽은 사회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이 두 날개가 모두 필요하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념에만 골몰한 나머지 양자의 관계가 견원(犬猿) 그 이상인 것이 요즈음의 실태다.

섣불리 정치적 이념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에 이어 또 하나의 구호인 ‘평화’는 서로의 존재와 소중함을 인정하는 위에서 구가될 수 있는 것이겠기에 꺼내본 말이다.

1. 세 가지 진리, 공제(空諦)·가제(假諦)·중제(中諦)

불교에서는 참다운 수행의 길로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길 즉, 중도를 강조한다. 석존께서 성도하신 후 교진여(憍陳如) 등 5비구에게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도 중도였다. 경전에 따라 혹은 종파에 따라 설명하는 방법에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원시불교의 중도설, 중관파의 팔부중도설(八不中道說), 천태종의 삼제원융관(三諦圓融觀)에 의한 중도설 등이 주로 설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삼제원융관을 살펴 불교에도 좌익과 우익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모습과 역할을 하고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천태종에서는 삼제원융관인 중도에 의해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도리를 밝히고 있다. 삼제는 진제(眞諦)로서의 공(空), 속제(俗諦)로서의 가(假), 그리고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진리인 중(中) 등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차례로 살펴보면,

공제(空諦, 眞諦)는 본체적 측면에서 삼라만상을 바라본 것으로, 삼라만상은 집착하는 중생의 마음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자성이 없는바 공일 수밖에 없음을 설파한 것이다. 즉, ‘파정(破情)’으로서 우익(=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다.

가제(假諦, 俗諦)는 현상적 측면에서 삼라만상을 바라본 것으로, 실체가 없음에도 인연화합에 의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사실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즉, ‘입법(立法)’으로서 좌익(=진보)적 입장에 서있다.

중제(中諦)는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입장에서 삼라만상의 실상을 본 것으로, ‘공’과 ‘가’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쳐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포용하는 입장에서 관찰할 것을 말한다. 즉, 양익(兩翼=중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을 바탕으로 중도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우선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바탕이 공(空)함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목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세계를 가(假)의 입장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끝으로 양자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차원에서 정리하면, 현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세계임을 아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는 새로운 안목이 열리게 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절대긍정인 중도의 세계다.

2. 좌익인 <대비주>와 우익인 『반야심경』

천도재 등에서 영가의 업을 청정하게 하는 의식인 「관욕(灌浴)」의 첫 번째 편(篇)인 ≪인예향욕편(引詣香浴篇)≫ 말미의 주(註)에,

<대비주>와 『반야심경』을 차례로 독송하라(次誦大悲呪 及心經亦得)

는 대목이 있다.

<대비주>를 독송하는 이유는 ‘내가 만일 도산지옥 향하여서 나아가면 도산지옥의 모든 칼날 제 스스로 꺾어지고(我若向刀山 刀山自摧折)’ 등 『천수경』의 ‘육향(六向)’에서 보듯 <대비주>의 주력(呪力)으로 도산·화탕·지옥·아귀·수라·축생 등 어느 곳을 향하든 자유로울 수 있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같지만 그 방법을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뇌와 재액을 건넜느니라(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라는 말씀에서와 같이 제법개공의 입장에서 찾는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양자의 입장을 앞서 살핀 삼제원융관(三諦圓融觀)에 배대하면 <대비주>는 ‘가제’에, 『반야심경』은 ‘공제’에 각각 해당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중도’를 지향하려는 것이라 하겠다. 즉, 양쪽 날개가 제 역할에 충실하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비주>와 『반야심경』 가운데 어느 쪽도 생략해서는 안 되고, 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원만한 균형을 추구해야하는 불교의식의 특성상 그 구성의 중요한 기틀이 된다 하겠다.

3. 생을 마감하며 지니고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마지막 그 길을 가기 위해 입는 옷인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사흘이라도 닦은 마음은 천년에 보배지만,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라(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는 말씀처럼, 아무리 애를 써서 모은 재산일지라도 지니고 갈 수 없기 때문이란다.

때문에 임종을 맞이한 사람의 언행에서 우리는 진솔함을 본다. 일체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임종자의 유언만큼은 어떻게든 존중해주려고 노력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남은 자들의 도리라고 여기고 있다.

불교의 존재이유는 중생들의 고통을 최대한 덜어주고 진정한 이상향을 제시하여 그곳까지 안내하는데 있다. 임종자를 위한 배려도 그 가운데 하나다. 때문에 긴 세월을 두고 숙고해 왔으며, 도출해낸 답이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다비문(茶毘文)」과 여기에 입각한 불교식 장례절차다.

그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선사스님들의 예지로 마지막 그 길에도 모시고 갈 수 있도록 고안된 두 가지 성보(聖寶)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가제’에 견주어 살핀 <대비주>의 내용을 범어(梵語)로 써놓은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이고, 다른 하나는 ‘공제’에 배대해 알아본 『반야심경』의 증보판격인 『금강경』의 전문(全文 5,149자)을 재료로 조성한 자탑(字塔)! ‘금강탑다라니(金剛塔陀羅尼)’이다. 이 두 성보를 모실 수 있도록 한 것은 기상천외한 발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는 그 길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로써 죽음의 길도 불자에게는 더 이상 외롭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4. 날개가 제 역할을 하려면…

천수다라니는 망자의 머리맡이나 탑다라니의 옆에 모셔두었다가 염습(殮襲)시 고깔처럼 접어, 망자의 시신을 매듭으로 고정시킨 그 매듭에 머리 쪽에서 다리 쪽을 향해 위에서부터 차례로 꼽듯이 모신다. 그리고 다시 물고기의 비늘처럼 아래쪽을 향하게 하여 시신을 장엄한다.

천수다라니의 공능(功能)은 대중 공양시에도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으니 ‘천수물’이 그것이다. 대방 천장 중앙에 천수다라니를 붙여 모시고 공양시 대중에게 돌릴 초관(哨灌)이나 혹은 다시 되 거둔 절수통(絶水桶=천수동이)의 천수물에 그 그림자를 투영시킴으로써 굶주린 아귀의 주림을 달래줄 음료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데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금강탑다라니’는 『금강경』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에서,

또 수보리야, 이다음에 이 경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설하면, 마땅히 알지니, 이곳은 모든 세간의 천상·인간·아수라들 모두가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과 같이 할 것이니라.(復次 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ㅣ皆應供養 如佛塔廟)

하셨듯, 망자의 시신을 모신 앞에 설치한 병풍 한가운데 유족을 향한 쪽으로 걸어 모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순간 빈소는 불국(佛國)이 되고, 망자를 위한 불사를 거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염습 후, 입관을 마치고 다라니의 정면이 밖을 향하게 하여 시신 위에 덮듯이 모신다.

목탑이나 석탑 혹은 전탑(塼塔) 등 여타의 탑은 이동이 불가능하여 모시고 다닐 수 없으나 자탑(字塔)인 금강탑다라니는 마지막 순간에도 모실 수 있는 기막힌 탑이다. 망자를 극진히 전송하려는 사람들의 진정한 배려와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정리컨대, 중도인 제법실상의 도리는 가제와 공제를 차례로 관하며 두 명제의 어울림을 추구하여 얻어낸 최선의 모범답안이다. 그리고 망자를 위해 이를 가시화하여 정리한 것이 ‘천수다라니’와 ‘금강탑다라니’며, 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 이상의 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모든 세계 모든 티끌이 빠짐없이 묘유(妙有)인 실체며, 삼라만상 각자 각자가 주인공이니라(刹刹塵塵皆妙體 頭頭物物總家翁)’는 말씀이 있다. 자신과 같은 무게로 상대를 인정하고 포용하라는 말씀이다. 또, ‘어느 곳에 있더라도 주인의식을 지니면, 처한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이다(隨處作主 立處皆眞)’라는 말씀도 있다. 자신만의 위치와 역할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왼손과 오른손이 제각기 다른 일을 하는 듯이 보여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듯,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시고 갈 수 있는 것이 ‘천수다라니’와 ‘금강탑다라니’임에서 확인하였듯 불교에서의 좌익과 우익은 모두 중도인 평화를 지향한다.

靑山疊疊彌陀窟(청산첩첩미타굴) 겹쳐진듯 푸른산은 아미타불 극락토요
蒼海茫茫寂滅宮(창해망망적멸궁) 끝도없는 푸른바다 부처님의 궁전이라.
物物拈來無罣碍(물물염래무가애) 어느것을 가져와도 걸릴바가 없으련만
幾看松亭鶴頭紅(기간송정학두홍) 몇번봤나 솔정자에 붉은머리 학의모습.

-해동사문 원효(元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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