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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각집천리 길을 가려면 - 끽다거(喫茶去),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

최고관리자님    작성일2018-12-07 16:50:17    1,074    0
천리 길을 가려면 - 끽다거(喫茶去),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

 

내용

【요점】

1. 조주끽다거(趙州喫茶去)
2. 배추 잎과 큰스님
3. 바늘과 밥풀
4.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내용】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있다. 차 마시고 밥 먹는 것처럼 흔히 있는 예사로운 일을 이르는 말이다. 선지식들은 도(道) 깨치는 일이 먼 곳에 있지 않고 일상비근(日常卑近)한 곳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도 깨치는 일은 세수(洗手)하면서 손으로 코 만지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고도 한다.

차(茶) 이야기가 나오면 조주(趙州. 778-897) 스님과 함께 생각나는 화두가 있다. ‘끽다거(喫茶去)’가 그것이다.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여드는 천하의 납자를 제접(提接)하실 때면 스님께서 으레 활용하셨던 공안(公案)이다. 해서 이를 ‘조주끽다거(趙州喫茶去)’ 『會元』4. 趙州從諗章 / 沙門新到 曾到此閒麽 曰 曾到 師曰 喫茶去 又問僧 僧曰 不曾到 師曰 喫茶去 라 불렀고, 지금도 조주 스님의 전매특허인양 하고있다. 내용인 즉, 어느 날 조주 스님에게 하루는 두 사람의 객이 찾아왔다 조주 스님이 한 사람에게 물었다.

“전에 오신 적이 있는가.”
“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그러신가, 차나 한잔 드시게.”
그런데 같은 질문에
“처음 뵙습니다.”
“그러신가, 자네도 차나 한잔 드시게.”
그러자 곁에 있던 원주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스님께서는 왜 뵌 적이 있다고 해도 없다고 해도 똑같이 차를 마시라고 하십니까?”고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원주, 자네도 한잔 드시게”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좀처럼 큰스님의 심중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말을 바꿔 이런 이야기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1> 배춧잎과 사람의 유무(有無)

어느 때, 큰 스승을 구하려는 수자(修者) 두 사람이 함께 어느 절을 찾아갔다. 물론 그 절에 큰 스승이 계시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절 올라가는 한 쪽으로 개울이 흘러 좋은 길벗이 돼주었다. 그런데 그때 한 스님이 말하기를,

“이 절에는 사람이 없나 봅니다.”하며 개울을 가리켰다. 바라보니 커다랗고 싱싱한 배추 잎 하나가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본 도반인 그 스님도,
“그렇군요.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을 받았다.
마침 그때 절 쪽에서 웬 노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젊은 수자님들―.”
주위에 다른 이가 없으니 자기들을 부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예―, 왜 그러십니까?”하고 대답했다.
“거기 배추 잎 하나 떠내려가는 거 못 봤소?”
“예―, 봤습니다.”
“미안하지만, 그것 좀 건져주시오.”
그러자 배추 잎을 먼저 발견한 스님이 선뜻 개울로 들어가 배추 잎을 건져 가지고 나오며 도반 스님에게 말했다.
“이 절에 사람이 있는 것 같군요.” 하였다. 그러자 다른 스님도 먼저처럼 말을 받았다.
“예, 그건 것 같습니다. 올라가시지요.”라고,
여기서 말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배춧잎’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하며 내친김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소개해 보기로 하자.

<2> 큰스님이 주신 바늘(針)의 의미

큰절이 있었다. 절이 커서가 아니라 큰스님이 계셔서다. 중당(中唐)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자계(自戒) ‘누실명(陋室銘)’에서 노래했듯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고,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하다(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하였기에 하는 말이다.

어쨌거나 큰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나니 보물 있다는 말이 도적의 귀에 들어간 셈이다. 법을 훔치려는 천하의 납자(衲子)들은 물론 청안도인(靑眼道人)의 꿈을 꾸는 행자(行者)들까지 많이 모여들었다.
이 가운데 행자들은 아직 계(戒)도 받지 않은 처지인지라 어쩌다 먼발치에서 큰스님을 뵐 뿐, 늘 동경의 대상이기만 했다. 그런 어느 날, 상행자(上行者) 한사람이 하행자들에게,
“행자님들, 오늘 큰스님을 뵙고 인사를 올려야하니 준비를 하시오.”라고 했다. 행자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산중에 들어 온 것이 오직 큰스님을 뵙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마치 혼례를 앞둔 새색시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저녁을 기다렸다.
저녁 예불이 끝나고 다시 나타난 상행자의 안내로 큰스님을 뵙게 되자 우선 삼배를 올린다. 큰스님은 아무 말씀 없이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행자들이 자리에 앉자 큰스님은 품속에서 까만 종이로 싼 무언가를 꺼냈다. 바늘쌈지다. 조심스레 펼치자 시리도록 하얀 바늘들이 속살을 드러낸다. 큰스님은 소중한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 가운데 하나를 집어 가까이 있는 행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행자들에게도 똑같이 하나씩 정성스럽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당신 자리에 돌아가 앉더니 먼저와는 다른 손짓을 했다. 그만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싱겁지만 큰스님과의 첫 대면은 이렇다 할 말씀 한마디 듣지 못하고 그렇게 끝났다.
그래도 행자들은 나름대로 가슴 벅찬 행복을 느끼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큰스님께서 바늘을 주실 때는 무언가 깊은 뜻이 있음에 틀림없겠기 때문이다. 바늘은 그때부터 행자들의 화두가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다른 상행자가 물었다.
“행자님들, 큰스님께서 무어라 말씀이 있으시던가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혹시 받으신 것이라도 있습니까?”
“ … ”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바늘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행자들에게 바늘은 이미 화두였기 때문이다. 본인이 지닌 화두는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이구즉염(離口卽染)’ 화두는 입안의 침과 같아 입을 떠나는 순간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용(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듯, 조개가 진주를 품고 있듯 절대로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상행자가 그런 하행자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한 번 씩 웃고는,
“바늘 하나씩 받으셨지요?”라고 묻는다.
하행자들은 천기라도 누설이 된 듯 놀라게 마련이다. 이때 재차 상행자가,
“그래 그 이치를 아셨습니까?”고 묻는다. 하행자들은,
“어찌 짐작인들 하겠습니까.”하고 대답한다. 화두가 그렇게 쉽게 깨쳐진다면 좋으련만,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의미다. 상행자는 다시 말한다.
“행자님들, 큰스님께서 바늘을 주신 것은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물 버리는 수채에 가보면 아무리 조심해도 간혹 밥알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미칠근(一米七斤) 즉, 한 알의 곡식에도 많은 은혜가 스며있음을 생각한다면, 주워 먹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작은 밥알이, 그것도 물에 들어가 불었으니 자칫 뭉그러지기 쉽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바늘을 사용해 콕 찍어 맑은 물에 살래살래 흔들어 입에 넣으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의외의 이야기다. ‘바늘’이라는 화두에 걸었던 기대가 그야말로 바늘 끝에 닿은 풍선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단 며칠이기는 하지만, 무슨 대단한 화두라도 받은 양 소중히 간직한 바늘이 끔찍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하산을 결심하는 행자도 없지 않다고 한다.

<3>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이쯤에서 이야기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첫 번째는 ‘조주끽다거(趙州喫茶去)’, 두 번째는 ‘배추 잎’, 세 번째는 ‘바늘과 밥풀’을 주제로 한 이야기다. 그리고 보니 모두 일상비근한 일이다. ‘천리 길을 가려면 첫 걸음을 바르게 하라(欲行千里 一步爲正)’는 말이 있듯 방향을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불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성불을 하늘 꼭대기나 우주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자신과 일상비근(日常卑近)한 곳에서 찾으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께서도 긴 시간의 고행을 마치시고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을 하셨다. 궤도를 수정하신 것이다. 아무리 노력을 했어도 방향이 잘못 설정되었다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든 예화들은 길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해주려는 친절한 말씀이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하고 묻는 조주 스님에게 스승인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화상은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다. 도는 달리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나니 분별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아끼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탐심(貪心)이고, 후자는 보은(報恩)이다?! 보은은 성불의 문이고, 탐심은 윤회의 문이다.
⑴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 중국 당나라 임제종 승려. 속성은 학(郝)씨, 당나라 조주(曹州) 사람. 조주(趙州)의 관음원에 있었으므로 조주라 함.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법제자. 어려서 조주의 호통원(扈通院)에서 출가하였다. 뒤에 숭악(嵩岳)의 유리단(琉璃壇)에 가서 계를 받고 남전(南泉)에게 돌아왔다. 뒤에 대중이 청하여 조주 관음원에 있게 하니, 이곳을 동원(東院)이라고도 하며, 교화를 크게 떨치다가 당나라 건녕 4년 120세에 입적하다. 시호(諡號)는 진제(眞際)대사.

⑵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의 제자로서 『조당집』제14권, 『전등록』제6권 등에 자세한 전기를 전하고 있으며, 『어록』도 전하고 있다. 남전화상의 속성은 왕씨로 왕노사(王老師)라고 불리며, 안휘성 귀지현의 남전산(南泉山)에서 행화를 펼쳤다. 문하에 조주종심, 장사경잠, 육응대부 등 뛰어난 선승들을 배출했기 때문에 후대에 마조문하의 서당지장, 백장회해와 함께 3대선승(三大禪僧)으로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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