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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벽해

최고관리자님    작성일2017-03-27 13:04:08    1,573    0
벽해

智勇兼運 輔國利衆 妙音後身 海潮音主 碧海堂 正熙 大禪師 功德碑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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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抵 故人의 功德을 기림에는 基準이 있으니 時代의 要求에 어떻게 副應했는가이다. 그리고 그 準器에는 智慧와 勇氣 두 눈금이 있다. 이 두 要件을 充足하고 肯定的 삶을 營爲했다면 當事者는 물론 周邊과 後學들에게도 肯志다. 이 碑의 主人公은 이를 具足한 분이다. 스님은 一八九八(戊戌)年 二月 十七日 서울 麻浦區 新水洞에서 父親 宜寧南公과 母親 淸州韓氏 사이에 獨子로 誕生하니 諱가 順奉이다. 宿世의 善緣으로 佛門에 뜻을 두고 十六歲(一九一四)에 僧伽寺로 나아가 敬成和尙과 敬守和尙을 恩師와 戒師로 祝髮하여 沙彌戒를 受持하니 法名이 正熙다. 一九二一年 奉恩寺로 移鉢 映湖和尙에게 比丘戒를 受持하였으며 一九二五年 奉元寺로 移鉢 碧雲和尙의 丈室에 들어 印可를 得하고 建幢하였다. 그 후 當代의 魚丈 李月河和尙을 師事하며 梵唄의 全科程을 履修하고 魚丈으로서의 關門을 通過하여 梵唄中興 第二祖가 되었다. 스님은 天賦的으로 正直 和雅 淸徹 深滿 遠聞 등 梵音의 五德을 모두 갖추었다. 그러나 修行與件이 如意치 않자 宿世의 福業이 不足함이라 여기고 供養主를 自任 三寶께 供養하며 釜竈를 白紙삼아 三藏을 익혔다. 이것은 一例일 뿐 客觀的으로 不備한 處地를 모두 工夫處로 삼아 修行에 盡力했다. 傳說같은 이 逸話는 後日 懶怠한 後學들을 警責하는 金言이 되었다. 梵唄도 일과 함께 익혔고 親히 지은 放生歌에서 보듯 恒常 菩薩行을 于先視하였으며 觀音呪力을 쉬지 않았다. 이렇듯 스님은 一切時 一切處 一切事를 修行으로 一貫하였고 作法에 臨할 때면 夏節에는 濕手巾이 冬節에는 乾手巾이 늘 함께 했으니 스님에게 齋場은 곧 時空을 超越한 佛會上이었다. 後日 名聲을 듣고 遠近의 僧徒가 雲集하였으나 스님의 가르침은 嚴格하여 그 關門을 通過한 이로는 松巖和尙이 唯一하다. 한편 日帝治下의 屈辱에 더해 韓民族의 魂을 抹殺하려는 政策의 一環으로 總督府에서 寺刹令을 發表하고 梵唄와 作法을 禁止시켰다. 이에 梵唄의 脈을 이음이 곧 民族의 魂을 이음이요 作法의 滅失을 막음이 곧 法燈을 護持함이라는 信念으로 이를 守護함에 더욱 精進했다. 愛寺心도 남달라 奉元寺 大房과 鐘閣建立 및 滿月殿 丹靑佛事에 都化主로서 그 所任을 다했다. 愛宗心 亦是 他의 追從을 不許했으니 政治的 計算下에 惹起된 法難時에도 斷食으로 韓國佛敎의 正體性 維持에 獻身했다. 다른 이가 수레를 두드릴 때 소를 쳤고 增上慢의 무리가 敎界를 어지럽힐 때도 未來를 내다보며 黙黙히 梵唄를 지켰다. 드디어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되고 一九七三年 梵唄는 大韓民國重要無形文化財 第五十號로 指定되었다. 一九八七年에는 靈山齋가 團體로 指定되더니 二○○九年에는 靈山齋가 유네스코에서 指定한 世界文化遺産으로 登載되는 快擧를 이루며 韓民族이 文化民族임을 世界萬邦에 誇示했다. 스님의 功이 빛을 發하는 瞬間이었다. 末年에는 維摩居士의 稱病을 模範하여 春川 香爐山 普陀寺로 移鉢隱居한 뒤 保任에 臨하였다. 그럼에도 德과 聲을 欽慕한 僧俗이 雲集함에 春川을 基點으로 하는 江原道 梵唄作法의 濫觴이 되었다. 平素 右手頭指를 세워 後學들의 質問에 簡潔히 答하더니 一九七二年 五月 八日 臨終偈를 남기고 世壽 七十四歲 法臘 五十九年을 一期로 忽然히 西天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四十年 門徒와 四部大衆은 스님에 對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아무 痕迹도 남기지 말라는 遺囑을 어기기로 하였다. 이에 스님이 보인 菩薩行을 龜鑑으로 받들고자 貞石을 가려 碑를 세워 臨終偈를 되새기며 功德을 기린다.

<臨終偈> 我是本來西天人 暫時遊歷海東國 今收萬行歸覺路 末後一句示本懷
無生法忍眞梵音 各自銘心切莫忘


佛紀 二五五六年 五月 七日 韓國佛敎太古宗 第十七世 宗正 慧草德永 謹撰

 

벽해

지용겸운 보국이중 묘음후신 해조음주
지혜와 용기를 함께 쓰시어 나라에 충성하고 중생을 보살피셨으며
묘음보살의 후신으로 해조음의 주인공이신
부처님의 말씀을 떨치기 위해 범패를 중흥하신

벽해당 정희 대선사 공덕비


 

내용

대저 고인의 공덕을 기림에는 기준이 있으니 시대의 요구에 어떻게 부응했는가 이다. 그리고 그 준기(準器)에는 지혜와 용기 두 눈금이 있다. 이 두 요건을 충족하고 긍정적 삶을 영위했다면 당사자는 물론 주변과 후학들에게도 긍지다. 이 비의 주인공은 이를 구족한 분이다. 스님은 1898(무술)년 2월 17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서 부친 의령남공과 모친 청주한씨 사이에 독자로 탄생하니 휘가 순봉(順奉)이다. 숙세의 선연으로 불문에 뜻을 두고 16세(1914)에 승가사(僧伽寺)로 나아가 경성(敬成) 화상과 경수(敬守) 화상을 은사와 계사로 축발하여 사미계를 수지하니 법명이 정희(正熙)다. 일구이일년 봉은사(奉恩寺)로 이발(移鉢) 영호(映湖) 화상에게 비구계를 수지하였으며 1925년 봉원사(奉元寺)로 이발 벽운(碧雲) 화상의 장실에 들어 인가를 득하고 건당하였다. 그 후 당대의 어장 이월하(李月河) 화상을 사사하며 범패의 전과정을 이수하고 어장으로서의 관문을 통과하여 범패중흥 제2조가 되었다. 스님은 천부적으로 정직(正直) 화아(和雅) 청철(淸徹) 심만(深滿) 원문(遠聞) 등 범음의 오덕을 모두 갖추었다. 그러나 수행여건이 여의치 않자 숙세의 복업이 부족함이라 여기고 공양주를 자임 삼보께 공양하며 부조(釜竈)를 백지삼아 삼장을 익혔다. 이것은 일례일 뿐 객관적으로 불비한 처지를 모두 공부처로 삼아 수행에 진력했다. 전설같은 이 일화는 후일 나태한 후학들을 경책하는 금언이 되었다. 범패도 일과 함께 익혔고 친히 지은 방생가(放生歌)에서 보듯 항상 보살행을 우선시하였으며 관음주력을 쉬지 않았다. 이렇듯 스님은 일체시 일체처 일체사를 수행으로 일관하였고 작법에 임할 때면 하절에는 습수건(濕手巾)이 동절에는 건수건(乾手巾)이 늘 함께 했으니 스님에게 재장은 곧 시공을 초월한 불회상이었다. 후일 명성을 듣고 원근의 승도가 운집하였으나 스님의 가르침은 엄격하여 그 관문을 통과한 이로는 송암(松巖) 화상이 유일하다. 한편 일제치하의 굴욕에 더해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총독부에서 사찰령을 발표하고 범패와 작법을 금지시켰다. 이에 범패의 맥을 이음이 곧 민족의 혼을 이음이요 작법의 멸실을 막음이 곧 법등을 호지함이라는 신념으로 이를 수호함에 더욱 정진했다. 애사심도 남달라 봉원사 대방과 종각건립 및 만월전 단청불사에 도화주로서 그 소임을 다했다. 애종심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정치적 계산하에 야기된 법난시에도 단식으로 한국불교의 정체성 유지에 헌신했다. 다른 이가 수레를 두드릴 때 소를 쳤고 증상만의 무리가 교계를 어지럽힐 때도 미래를 내다보며 묵묵히 범패를 지켰다.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73년 범패는 대한민국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1987년에는 영산재가 단체로 지정되더니 2009년에는 영산재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며 한민족이 문화민족임을 세계만방에 과시했다. 스님의 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말년에는 유마거사의 칭병을 모범하여 춘천 향로산 보타사로 이발(移鉢) 은거한 뒤 보림에 임하였다. 그럼에도 덕과 성(聲)을 흠모한 승속이 운집함에 춘천을 기점으로 하는 강원도 범패작법의 남상이 되었다. 평소 우수두지(右手頭指)를 세워 후학들의 질문에 간결히 답하더니 1972년 5월 8일 임종게를 남기고 세수 74세 법납 59년을 일기로 홀연히 서천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40년 문도와 사부대중은 스님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유촉을 어기기로 하였다. 이에 스님이 보인 보살행을 구감으로 받들고자 정석을 가려 비를 세워 임종게를 되새기며 공덕을 기린다.

<臨終偈(임종게)>
我是本來西天人(아시본래서천인) 나는 본래 서천의 사람으로
暫時遊歷海東國(잠시유력해동국) 잠시 바다 동쪽나라에 노닐었네.
今收萬行歸覺路(금수만행귀각로) 이제 만행을 거두고 깨달음의 길로 돌아가며
末後一句示本懷(말후일구시본회) 진정 한마디를 남겨 본마음을 보이노라.
無生法忍眞梵音(무생법인진범음) 무생이란 법인이 참된 범음이니
各自銘心切莫忘(각자명심절막망) 각자 명심하여 절대로 잊지 말라.

불기 2556년 5월 7일 한국불교태고종 제17세 종정 혜초덕영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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