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한가위 -유심정토 자성미타(唯心淨土 自性彌陀)-
내용
【요지】
1. 제6의식(意識)의 영역은 전오식(前五識)에 두루 통한다.
2. 육안(肉眼)과 심안(心眼)은 다르다.
3. 대책 없는 삶은 오히려 죽음에로의 길이다.
4. 「점안작법」에 삶에로의 활로가 있다.
5. 석존과 불자인 우리는 ‘진리 추구 DNA’가 일치한다.
6. 정토(淨土)를 즐기는 법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
【내용】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이 있다. 눈, 귀, 코, 혀, 피부 그리고 마음이 그것이다. 그런데 앞의 다섯 기관은 각기 고유의 영역이 있어 각자의 역할이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눈은 보기만 하고 귀는 듣기만 하며, 코는 냄새만 맡고 피부로는 느끼기만 한다. 그러나 여섯 번째 감각기관인 마음은 여타 다섯 기관이 하는 일에 모두 간여한다. ‘봐보다’ ‘들어보다’, ‘맡아보다’, ‘맛보다’, ‘느껴보다’, ‘생각해보다’에서 알 수 있듯 그 영역은 여타의 기관에 두루 통하고, ‘~보다’라는 말로 그 역할을 표현한다. 그래서 심안(心眼)이라는 말도 있다.
얘긴 즉,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⑴라 하셨듯 마음만 잘 먹고 다스리면 무엇이던지 가능하다는 말이 하고 싶어 꺼낸 말이다. 마음의 주인은 각자 자기 자신이니 어려운 일이 아닐 터인데도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은 평소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1> 육안(肉眼)과 심안(心眼)의 차이
일 년 중 달이 가장 밝다는 팔월 한가위⑵다. 아주 바쁜 일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허공중천에 높이 떠있는 달을 바라보며 자연의 신비로움과 함께 여러 가지를 생각할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도 느낄 것이고, 동심으로 돌아가 방아 찧는 토끼도 찾아보며 진솔한 마음으로 소원도 빌 어 볼 것이다. 그러면서 그간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유도 갖게 되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라면 고향에 두고 온 많은 사람을 떠올리며 그간 잊고 지냈던 추억에 뭐처럼 눈가를 적셔보기도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육안과 심안의 차이가 있다. 육안은 하늘의 달만 바라보지만, 심안은 방금 살핀 것처럼 시공을 넘나들며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살핀다는 점이 그렇다. 이런 심안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또, 그런 기회를 진지한 자세로 자주 갖는 것이 곧 수행이다. 더구나 수행의 보조자인 달은 매일 밤 떠오르니 수행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 달을 바라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2> 대책 없는 삶은 오히려 죽음에로의 길이다.
이쯤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우리가 하루하루 지내는 것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죽어가고 있다고 해야 할 지에 대해서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지적처럼⑶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반드시 그 일이 닥칠 텐데, 거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마당에 혼자서 약은척하거나 매사 너무 서두를 일이 아니다. 조금 더 가졌답시고 으스대거나 부족하다고 아등바등할 일도 아니다. 닭장에 갇혀있으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른 체 열심히 모이를 쪼는 한편 쉼 없이 싸우는 닭들의 모습과 우리네 모습이 너무도 닮아있다.
여기까지가 달을 바라보며 내가 정리할 수 있는 그간의 우리네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 할까? 그냥 죽어갈 수는 없다. 남들이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까지 살아오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이대로 죽는다면 이만 저만 손해가 아니다. 그러니 진정 자신을 사랑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한다.
<3> 「점안작법(點眼作法)」에 삶에로의 활로가 있다.
그러나 문제의식만 가지고 있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천리 길을 가고자 할진대 첫 걸음을 바르게 하라(欲行千里 一步爲正)’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정견(正見)’이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음에 크게 공감하며 앞서 말한 심안과 그 활용의 예를 살펴 활로를 모색코자 한다. 부처님 존상을 조성하고 거행하는 「점안작법」에서 심안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내용 가운데 등장하는 오안(五眼) 가운데 육안(肉眼)을 제외한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등이 모두 심안이다.
심안의 의미를 종류별로 살피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인연과 인과의 원리에 따라 형성된 것임을 깨달음이 ‘천안’이고, 이들의 바탕이 예외 없이 공(空)함을 아는 것은 ‘혜안’이다. 이렇게 깨달은 바를 또 다른 나[我]인 모든 중생에게 설파하는 것이 ‘법안’이고, 일체지(一切智)를 남김없이 성취하여 아는 것은 불안이다.⑷
서가세존께서 정각을 이루시던 위대한 순간을 회상컨대, 샛별을 바라다보시던 육안을 통해 천안을 얻으셨고, 그 천안을 통해 혜안이 열리셨으며, 이렇게 차례로 법안과 불안까지 얻고 열리셨기로 마침내 정각을 성취하셨던 것이다. 이는 곧 불생불멸의 무위열반(無爲涅槃)을 증득하심이니 죽음의 길로부터 삶의 길에로의 일대 전환이셨다.
<4> 석존과 불자인 우리는 ‘진리 추구 DNA’가 일치한다.
나무나 돌 혹은, 쇠붙이로 조성한 불상도 정성을 다해 점안식을 거행하면 진불(眞佛)이 된다고 우리 불자들은 믿고 있다. 중생에게 있어 부처님은 의사나 길잡이 역할이신데,⑸ 점안작법을 통해 이런 의미가 불상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사람인 우리가 부처의 재료로서 무정물(無情物)보다 못할 까닭이 없다. 못하다면 점안작법에서처럼 자신에 대한 점안에 정성을 다하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팔월 한가위다. 석존께서는 조그만 별을 보시고도 도를 깨치셨는데, 그보다 몇 배나 큰 한가위 대보름달을 보고도 깨치지 못한대서야 체면이 서겠는가? 그런 줄 알면서도 중생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울밑에 선 봉선화’가 따로 없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일도 아니다. 석존께서는 한때 실의에 빠진 나후라(羅睺羅) 존자를 타이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彼旣丈夫汝亦爾(피기장부여역이) 저들이 장부라면 너 또한 그러하니
不應自輕而退屈(불응자경이퇴굴) 스스로 가볍게 여겨 물러서지 말라.
후일, 이 말씀을 <불계나후라게(佛誡羅睺羅偈)>⑹라 불렀다. 나후라 존자는 부처님의 아드님이시다. 하지만 ‘진리 추구 DNA’가 일치하는 한 우리도 그분의 자손임에 틀림없다. 그분께서도 『법화경』 비유품(譬喩品)에서 ‘모든 중생이 다 내 자식이니라(一切衆生 皆是吾子)’⑺고 하셨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매일같이 한가위 달을 떠올리며 심안으로 살피면 정녕 하루하루가 그와 같을 것이다.
<5> 정토를 즐기는 법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절집 팔월에는 이렇다 할 이벤트성 행사가 없다. ‘유심정토 자성미타(唯心淨土 自性彌陀)’⑻라는 말씀이 딱 어울리는 계절인 때문이리라. 정토가 다른 곳이랴! 근심 걱정이 없으면 그곳이 곧 정토다. 오곡백과가 익어 가는 계절이니 어진 사람이라면 달리 탐심(貪心)이 없을 것이다. 탐심이 없으니 진심(嗔心)이 없고, 진심이 없으면 치심(癡心)도 사라진다. 그런 이치다.⑼ 굳이 사찰이 아니더라도 발 닿는 곳이 모두 정토(淨土)다. 하지만 같은 물도 누가 마시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복(福)도 받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누리는 것이 더 어렵다. 정토를 즐기는 법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가 첫 번째니라(六度門中 行檀居首)’⑽라 하셨듯 나눔이 곧 그 시작이다.
한가위면 떠오르는 게송이 있다. 함께 누리고 싶어 소개드리며, 모쪼록 한가위 보름달처럼 모든 소원을 원만성취(圓滿成就)하시고 성불작조(成佛作祖)하시기를 충심으로 기원드리는 바이다.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서방정토 극락세계 만월모습 아미타불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미간백호 금색광명 온허공을 비추시니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그누구든 일념으로 미타명호 칭하오면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순식간에 무량한공 원만하게 이루리라.⑾
【요지】
1. 제6의식(意識)의 영역은 전오식(前五識)에 두루 통한다.
2. 육안(肉眼)과 심안(心眼)은 다르다.
3. 대책 없는 삶은 오히려 죽음에로의 길이다.
4. 「점안작법」에 삶에로의 활로가 있다.
5. 석존과 불자인 우리는 ‘진리 추구 DNA’가 일치한다.
6. 정토(淨土)를 즐기는 법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
【내용】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이 있다. 눈, 귀, 코, 혀, 피부 그리고 마음이 그것이다. 그런데 앞의 다섯 기관은 각기 고유의 영역이 있어 각자의 역할이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눈은 보기만 하고 귀는 듣기만 하며, 코는 냄새만 맡고 피부로는 느끼기만 한다. 그러나 여섯 번째 감각기관인 마음은 여타 다섯 기관이 하는 일에 모두 간여한다. ‘봐보다’ ‘들어보다’, ‘맡아보다’, ‘맛보다’, ‘느껴보다’, ‘생각해보다’에서 알 수 있듯 그 영역은 여타의 기관에 두루 통하고, ‘~보다’라는 말로 그 역할을 표현한다. 그래서 심안(心眼)이라는 말도 있다.
얘긴 즉,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⑴라 하셨듯 마음만 잘 먹고 다스리면 무엇이던지 가능하다는 말이 하고 싶어 꺼낸 말이다. 마음의 주인은 각자 자기 자신이니 어려운 일이 아닐 터인데도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은 평소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1> 육안(肉眼)과 심안(心眼)의 차이
일 년 중 달이 가장 밝다는 팔월 한가위⑵다. 아주 바쁜 일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허공중천에 높이 떠있는 달을 바라보며 자연의 신비로움과 함께 여러 가지를 생각할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도 느낄 것이고, 동심으로 돌아가 방아 찧는 토끼도 찾아보며 진솔한 마음으로 소원도 빌 어 볼 것이다. 그러면서 그간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유도 갖게 되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라면 고향에 두고 온 많은 사람을 떠올리며 그간 잊고 지냈던 추억에 뭐처럼 눈가를 적셔보기도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육안과 심안의 차이가 있다. 육안은 하늘의 달만 바라보지만, 심안은 방금 살핀 것처럼 시공을 넘나들며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살핀다는 점이 그렇다. 이런 심안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또, 그런 기회를 진지한 자세로 자주 갖는 것이 곧 수행이다. 더구나 수행의 보조자인 달은 매일 밤 떠오르니 수행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 달을 바라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2> 대책 없는 삶은 오히려 죽음에로의 길이다.
이쯤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우리가 하루하루 지내는 것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죽어가고 있다고 해야 할 지에 대해서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지적처럼⑶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반드시 그 일이 닥칠 텐데, 거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마당에 혼자서 약은척하거나 매사 너무 서두를 일이 아니다. 조금 더 가졌답시고 으스대거나 부족하다고 아등바등할 일도 아니다. 닭장에 갇혀있으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른 체 열심히 모이를 쪼는 한편 쉼 없이 싸우는 닭들의 모습과 우리네 모습이 너무도 닮아있다.
여기까지가 달을 바라보며 내가 정리할 수 있는 그간의 우리네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 할까? 그냥 죽어갈 수는 없다. 남들이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까지 살아오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이대로 죽는다면 이만 저만 손해가 아니다. 그러니 진정 자신을 사랑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한다.
<3> 「점안작법(點眼作法)」에 삶에로의 활로가 있다.
그러나 문제의식만 가지고 있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천리 길을 가고자 할진대 첫 걸음을 바르게 하라(欲行千里 一步爲正)’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정견(正見)’이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음에 크게 공감하며 앞서 말한 심안과 그 활용의 예를 살펴 활로를 모색코자 한다. 부처님 존상을 조성하고 거행하는 「점안작법」에서 심안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내용 가운데 등장하는 오안(五眼) 가운데 육안(肉眼)을 제외한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등이 모두 심안이다.
심안의 의미를 종류별로 살피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인연과 인과의 원리에 따라 형성된 것임을 깨달음이 ‘천안’이고, 이들의 바탕이 예외 없이 공(空)함을 아는 것은 ‘혜안’이다. 이렇게 깨달은 바를 또 다른 나[我]인 모든 중생에게 설파하는 것이 ‘법안’이고, 일체지(一切智)를 남김없이 성취하여 아는 것은 불안이다.⑷
서가세존께서 정각을 이루시던 위대한 순간을 회상컨대, 샛별을 바라다보시던 육안을 통해 천안을 얻으셨고, 그 천안을 통해 혜안이 열리셨으며, 이렇게 차례로 법안과 불안까지 얻고 열리셨기로 마침내 정각을 성취하셨던 것이다. 이는 곧 불생불멸의 무위열반(無爲涅槃)을 증득하심이니 죽음의 길로부터 삶의 길에로의 일대 전환이셨다.
<4> 석존과 불자인 우리는 ‘진리 추구 DNA’가 일치한다.
나무나 돌 혹은, 쇠붙이로 조성한 불상도 정성을 다해 점안식을 거행하면 진불(眞佛)이 된다고 우리 불자들은 믿고 있다. 중생에게 있어 부처님은 의사나 길잡이 역할이신데,⑸ 점안작법을 통해 이런 의미가 불상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사람인 우리가 부처의 재료로서 무정물(無情物)보다 못할 까닭이 없다. 못하다면 점안작법에서처럼 자신에 대한 점안에 정성을 다하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팔월 한가위다. 석존께서는 조그만 별을 보시고도 도를 깨치셨는데, 그보다 몇 배나 큰 한가위 대보름달을 보고도 깨치지 못한대서야 체면이 서겠는가? 그런 줄 알면서도 중생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울밑에 선 봉선화’가 따로 없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일도 아니다. 석존께서는 한때 실의에 빠진 나후라(羅睺羅) 존자를 타이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彼旣丈夫汝亦爾(피기장부여역이) 저들이 장부라면 너 또한 그러하니
不應自輕而退屈(불응자경이퇴굴) 스스로 가볍게 여겨 물러서지 말라.
후일, 이 말씀을 <불계나후라게(佛誡羅睺羅偈)>⑹라 불렀다. 나후라 존자는 부처님의 아드님이시다. 하지만 ‘진리 추구 DNA’가 일치하는 한 우리도 그분의 자손임에 틀림없다. 그분께서도 『법화경』 비유품(譬喩品)에서 ‘모든 중생이 다 내 자식이니라(一切衆生 皆是吾子)’⑺고 하셨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매일같이 한가위 달을 떠올리며 심안으로 살피면 정녕 하루하루가 그와 같을 것이다.
<5> 정토를 즐기는 법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절집 팔월에는 이렇다 할 이벤트성 행사가 없다. ‘유심정토 자성미타(唯心淨土 自性彌陀)’⑻라는 말씀이 딱 어울리는 계절인 때문이리라. 정토가 다른 곳이랴! 근심 걱정이 없으면 그곳이 곧 정토다. 오곡백과가 익어 가는 계절이니 어진 사람이라면 달리 탐심(貪心)이 없을 것이다. 탐심이 없으니 진심(嗔心)이 없고, 진심이 없으면 치심(癡心)도 사라진다. 그런 이치다.⑼ 굳이 사찰이 아니더라도 발 닿는 곳이 모두 정토(淨土)다. 하지만 같은 물도 누가 마시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복(福)도 받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누리는 것이 더 어렵다. 정토를 즐기는 법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가 첫 번째니라(六度門中 行檀居首)’⑽라 하셨듯 나눔이 곧 그 시작이다.
한가위면 떠오르는 게송이 있다. 함께 누리고 싶어 소개드리며, 모쪼록 한가위 보름달처럼 모든 소원을 원만성취(圓滿成就)하시고 성불작조(成佛作祖)하시기를 충심으로 기원드리는 바이다.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서방정토 극락세계 만월모습 아미타불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미간백호 금색광명 온허공을 비추시니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그누구든 일념으로 미타명호 칭하오면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순식간에 무량한공 원만하게 이루리라.⑾
-주(註)-
⑴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 제이십(大正藏 卷10 p.102a)
若人欲了知(약인욕요지) 누구라도 불법요지 깨닫고자 하올진대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삼세여래 일체제불 이분들을 뵈올지라.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다른생각 접어두고 법계성품 觀할지니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삼라만상 예외없이 이마음의 조화니라.
⑵한가위 : 추석(秋夕)의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 ‘한’이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란 ‘가운데’를 나타내는데, ‘가위’란 신라 시대 때 여인들이 실을 짜던 길쌈을 ‘가배(嘉排)’라 부르다가 이 말이 변해서 된 것이라 한다.
⑶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톨스토이-
⑷육안(肉眼)과 심안(心眼) : ①육안(肉眼) ; (s)māṃsa-cakṣua. 맨눈. 사람의 육신에 갖추어진 눈. 가시적인 물질인 색(色)만을 보는 육안(肉眼). ②천안(天眼) ; (s)divya-cakṣus.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환히 보는 신통한 마음의 눈. 천도(天道)에 나거나 선정(禪定)을 닦아서 얻게 되는 눈이다. 중생들이 미래에 생사하는 모양도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연과 인과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 현상적인 차별만을 볼 뿐 실체를 보지 못한다. ③혜안(慧眼) ; (s)prajñā-cakṣus. 우주의 진리를 밝게 보는 눈. 성문·연각 등 이승(二乘)에서 얻는 눈. 곧 만유의 모든 현상은 공(空)·무상(無相)·무작(無作)·무생(無生)·무멸(無滅)이라 보아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차별의 현상계를 보지 않는 지혜의 눈이다 그러나 공(空)의 도리는 보지만 아직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도리는 보지 못한다. ④법안(法眼) ; (s)dharma-cakṣus. 보살(菩薩)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모든 법을 관찰하는 눈. 일체법의 실상을 보며 다른 이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지만 가행도(加行道)를 알지 못한다. ⑤불안(佛眼) ; (s)buddha-cakṣus. 앞서 말한 4종의 눈은 물론 모든 법의 참모습[眞性]을 보는 부처님의 눈. 즉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눈. 이상 오종의 눈을 오안(五眼)이라 한다.
⑸『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大正藏 卷12 p.1112a) / 我如良醫知病說藥 服與不服非醫咎也 又如善導導人善導 聞之不行非導過也
⑹『精選懸吐緇門』 4장
⑺『大正藏』 卷9 p.14c
⑻자각종색선사(慈覺宗賾禪師)는 「권참선인겸수정토(勸參禪人兼修淨土)」에서 ‘유심정토 자성미타 개해탈지요문(唯心淨土 自性彌陀 蓋解脫之要門)’이라 述하였음. (大正藏 卷47 p.284b)
⑼頓捨貪嗔癡 常歸佛法僧 念念菩提心 處處安樂國(돈사탐진치 상귀불법승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 독중의독 삼독심은 미련없이 버리시고 / 한결같이 삼보님께 지성귀의 하시오며 / 일구월심 생각마다 깨달음을 향하시면 / 처하신곳 어디시든 안락국토 이옵니다.
⑽野雲比丘 述 「자경문(自警文)」
⑾安震湖 編 『석문의범(釋門儀範)』 卷上 (法輪社, 1931), p.88
⑴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 제이십(大正藏 卷10 p.102a)
若人欲了知(약인욕요지) 누구라도 불법요지 깨닫고자 하올진대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삼세여래 일체제불 이분들을 뵈올지라.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다른생각 접어두고 법계성품 觀할지니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삼라만상 예외없이 이마음의 조화니라.
⑵한가위 : 추석(秋夕)의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 ‘한’이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란 ‘가운데’를 나타내는데, ‘가위’란 신라 시대 때 여인들이 실을 짜던 길쌈을 ‘가배(嘉排)’라 부르다가 이 말이 변해서 된 것이라 한다.
⑶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톨스토이-
⑷육안(肉眼)과 심안(心眼) : ①육안(肉眼) ; (s)māṃsa-cakṣua. 맨눈. 사람의 육신에 갖추어진 눈. 가시적인 물질인 색(色)만을 보는 육안(肉眼). ②천안(天眼) ; (s)divya-cakṣus.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환히 보는 신통한 마음의 눈. 천도(天道)에 나거나 선정(禪定)을 닦아서 얻게 되는 눈이다. 중생들이 미래에 생사하는 모양도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연과 인과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 현상적인 차별만을 볼 뿐 실체를 보지 못한다. ③혜안(慧眼) ; (s)prajñā-cakṣus. 우주의 진리를 밝게 보는 눈. 성문·연각 등 이승(二乘)에서 얻는 눈. 곧 만유의 모든 현상은 공(空)·무상(無相)·무작(無作)·무생(無生)·무멸(無滅)이라 보아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차별의 현상계를 보지 않는 지혜의 눈이다 그러나 공(空)의 도리는 보지만 아직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도리는 보지 못한다. ④법안(法眼) ; (s)dharma-cakṣus. 보살(菩薩)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모든 법을 관찰하는 눈. 일체법의 실상을 보며 다른 이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지만 가행도(加行道)를 알지 못한다. ⑤불안(佛眼) ; (s)buddha-cakṣus. 앞서 말한 4종의 눈은 물론 모든 법의 참모습[眞性]을 보는 부처님의 눈. 즉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눈. 이상 오종의 눈을 오안(五眼)이라 한다.
⑸『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大正藏 卷12 p.1112a) / 我如良醫知病說藥 服與不服非醫咎也 又如善導導人善導 聞之不行非導過也
⑹『精選懸吐緇門』 4장
⑺『大正藏』 卷9 p.14c
⑻자각종색선사(慈覺宗賾禪師)는 「권참선인겸수정토(勸參禪人兼修淨土)」에서 ‘유심정토 자성미타 개해탈지요문(唯心淨土 自性彌陀 蓋解脫之要門)’이라 述하였음. (大正藏 卷47 p.284b)
⑼頓捨貪嗔癡 常歸佛法僧 念念菩提心 處處安樂國(돈사탐진치 상귀불법승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 독중의독 삼독심은 미련없이 버리시고 / 한결같이 삼보님께 지성귀의 하시오며 / 일구월심 생각마다 깨달음을 향하시면 / 처하신곳 어디시든 안락국토 이옵니다.
⑽野雲比丘 述 「자경문(自警文)」
⑾安震湖 編 『석문의범(釋門儀範)』 卷上 (法輪社, 1931),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