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각집 | 성공설(性空說) -인성설(人性說)에 대한 불교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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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주소 : http://yeongsan.or.kr/bbs/board.php?bo_table=data04&wr_id=50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18-01-05 21:12 조회1,142회 댓글0건
본문
성공설(性空說) -인성설(人性說)에 대한 불교의 입장-
내용
【요점】
1. 성선설도 상대적 개념, 집착은 생사의 원인이 된다.
2. 선악혼효설(善惡混淆說) 역시 대승 공관(空觀)에 배치된다.
3. 성공설(性空說)은 절대적 개념, 열반에 드는 문이다.
【내용】
사람의 본성은 선할까? 악할까? 평화롭게 잠든 아기 모습을 보면 성선설이 맞는 것 같고, 깨어 울고 보채거나 무엇이든 제 입으로만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 성악설이 맞는 것도 같아 혼란스럽다. 그뿐만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는 법 없이도 살 것 같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 모습으로 돌변했다거나, 사랑으로 백년해로를 약속하고 잘 살던 부부가 어느새 서로를 원수라 부르기 시작하는 것도 우리의 판단을 유보하게 한다.
인성설(人性說)의 전형은 대체로 맹자1)의 성선설과 순자2)의 성악설로 집약된다. 여기에 선악혼효설(善惡混淆說)까지 보태면 3가지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인성설의 이해에 도움이 될 다음 두 가지 예화를 들어보기로 하자.
<1>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모델이 되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 마리아델레그라치에 성당 식당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벽화 ‘최후의 만찬에 얽힌 이야기다.
‘최후에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기 전날 밤 12제자들과 함께 가진 만찬으로, 《신약성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등에 그 기록이 전한다. 이때 그리스도는 자신을 배신하려는 제자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빵과 포도주를 축복한 뒤 성찬의식을 행하였다.
다빈치는 이 벽화를 부탁 받고 고민했다. 예수님까지 모두 13사람을 그리기 위해서는 13사람의 모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인공마다 성격이 다르고 그와 같은 인물을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모델이 문제였다. 예수님처럼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인물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예수님의 모델로 적격인 한 청년을 만났다. 다빈치는 전후사정을 이야기하며 부탁했고 그 청년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 청년을 모델로 예수님의 그림을 완성하고 한 숨을 돌리려는데 먼저보다 더 큰 고민이 생겼다.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유다’의 모델 때문이었다. 예수님과는 상대적인 사람을 골라야 했는데 그런 정도로 악해 보이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채 4년을 허송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감옥에는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로 나쁜 사람을 가두는 곳이니 그 곳에 가면 당신이 찾는 사람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타당성이 있었다. 마침 잘 아는 옥사장이 있어 부탁했다. 드디어 감옥을 둘러 볼 수는 있었지만 다빈치는 실망했다. 자신이 찾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 포기하려는 참인데 감방 한 쪽에서 적임자를 발견했다. 다행이었다. 반가운 나머지 앞뒤 생각 없이 그에게 유다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아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다빈치는 반성했다. 그림을 완성하려는 욕심 때문에 상대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주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곧 사과하고 부탁을 거두려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울음을 멈추더니 자신을 잘 살펴보라고 했다. 그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다빈치는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몇 해 전 예수님의 모델이 돼주었던 훌륭한 미모의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유다의 모델이 되어줄 것도 허락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다빈치는 그 청년을 모델로 예수님에 이어 유다의 모습까지 완성할 수 있었다. 1494년에 시작해서 1498까지 장장 5년에 걸쳐 완성한 다빈치의 이 그림이 명화로서 명성을 얻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다.
<2> 사람의 본성은 선도 악도 아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육조단경(六祖壇經)』 행유(行由)에 보이는 말씀이다.
혜능 스님께서 아직 후원에서 방아찧던 노행자(盧行者)로 계실 때다. 오조(五祖) 홍인(弘忍)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얻고 그 증표로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았다. 그러나 승가와의 연륜이 일천한 노행자가 법맥을 이은 것이 시기의 대상이 됨을 우려한 홍인 스님께서는 노행자에게 거처를 옮길 것을 명하셨다. 홍인 스님과 노행자는 밤을 도와 강에 이르렀다. 노행자와 같은 제자를 얻게 된 다행스러운 생각에 홍인 스님께서 직접 노를 저서 강을 건네주시며 남쪽으로 피신할 것을 지시하셨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안 대중은 홍인 스님께서 염려하신 대로 대중공사 후, 노행자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사품(四品) 장군을 지낸 바 있는 혜명(惠明)이란 스님을 중심으로 구성된 수 백인의 추격대가 뒤를 쫓았다. 석존의 가사와 발우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두 달 반이란 긴 시간의 도주와 추격 끝에 노행자는 대유령(大庾嶺)에서 혜명 상좌에게 잡히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노행자는 의발을 바위 위에 올려놓더니,
「이 의발은 믿음의 표시인데 감히 힘으로 다투겠단 말인가?」
라는 말을 남기고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혜명 상좌 역시 추격의 목적이 사람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의발을 되찾는 것이었기에 노행자는 내버려두고 의발을 집어 들고자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의발이 꿈적도 하지 않았다. 혜명 상좌는 놀라는 한편, 노행자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행자여, 나는 법을 위해 온 것이지 의발을 욕심내어 온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안 노행자는 덤불에서 나와 반석 위에 앉았다. 혜명 상좌는 노행자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
「원컨대 행자께서는 나를 위해서 법을 설하여 주소서.」
했다. 노행자가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법을 위해 왔다면 모든 인연을 쉬고 한 생각도 내지 말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하고 조금 있다가 혜명 상좌에게 말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럴 때 어떤 것이 혜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不思善하고 不思惡하라 正與麽時에 那箇是明上座의 本來面目고)」
하였다. ‘본래면목(本來面目)’3)이라는 말이 비로소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만 주제에 관한 내용은 여기까지다.
<3> 여름에는 파랗고, 겨울에는 하얗다.
사람의 마음이 본래 악한 것이라면 어찌 선해 질 수 있으며, 반대로 본래 선한 것이라면 어찌 악해 질 수 있겠는가. 주변의 환경이나 교육을 말하기도 하지만, 금을 흙으로 혹은, 흙을 금으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 한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악도 선도 아니기에 때에 따라 악하게도 되고 선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성공설(性空說)’이라는 신조어로 사람의 성품을 표현해 보기로 했다.
마침 초등하교 5학년 때 배운 동요 ‘파란마음 하얀마음’이 생각난다. 잠시 가사에 떠올려보면,
<1절>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에요 /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 파아란 하늘보고 자라니까요.
<2절>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에요 /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계절에 따라 또는 주위의 환경에 따라 그 빛이 변할 수 있는 것은 본래 파랗지도 하얗지도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본성은 그런 것이다. 불교의 입장을 굳이 말한다면 ‘성공설(性空說)’이라 하겠다.
만에 하나 성선설이나 성악설 가운데 어느 한쪽을 주장한다면 윤회의 길을 면치 못할 것이고, ‘성공설’을 진정 이해하였다면 열반의 문도 그리 멀리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若人欲識佛境界(약인욕식불경계) 누구라도 부처경계 짐작하길 바란다면
當淨其意如虛空(당정기의여허공) 당연할사 그마음을 허공같이 비울지니,
遠離妄想及諸趣(원리망상급제취) 망상이며 모든취향 멀리멀리 여의어서
令心所向皆無礙(영심소향개무애) 어디에도 걸릴바가 없어야만 하느니라.
혹, 혼란스런 나머지 선과 악이 함께 섞여 존재한다는 선악혼효설(善惡混淆說)에 솔깃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존재론적인 면에서 실재하는 하나의 법으로 본 것인바 소승 상좌부(上座部) 계통의 하나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주장하는 삼세실유법체항유론(三世實有法體恒有論)과 다르지 않아 대승의 공관(空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쯤에서 결론을 말해보자.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혼효설은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남을 위하고 나를 위함이 비록 작은 선(善)일 수는 있지만 이 모두가 윤회 가운데 나고 죽는 원인이니라(爲他爲己雖微善 皆是輪廻生死因)’고 하신 야운비구(野雲比丘)의 말씀처럼 생사의 원인이 된다.
이에 견주어 성공설은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뇌와 재액을 건넌다(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고 하신 『반야심경』의 말씀처럼 절대적인 것으로서 이에 순(順)함은 열반의 문으로 드는 것이 된다.
‘털끝만큼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진다(毫釐有差 天地懸隔)’고 했다. 귀찮고 골치 아프다고 피할 일이 아니다. 인성설에 관한 문제는 자신의 영원한 미래가 달린 문제다. 지금까지 열심히 말한 내용을 똘똘 뭉쳐보니 어느 절 주련(柱聯) 내용으로 압축된다.
摩訶大法王(마하대법왕) 우주처럼 광대해라 위대할사 법왕이여!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짧도않고 그렇다고 긴것또한 아니로다.
本來非皁白4)(본래비조백) 본래부터 검은것도 하얀것도 아니건만
隨處現靑黃(수처현청황) 곳에따라 푸르게도 누르게도 나타나네.5)
【요점】
1. 성선설도 상대적 개념, 집착은 생사의 원인이 된다.
2. 선악혼효설(善惡混淆說) 역시 대승 공관(空觀)에 배치된다.
3. 성공설(性空說)은 절대적 개념, 열반에 드는 문이다.
【내용】
사람의 본성은 선할까? 악할까? 평화롭게 잠든 아기 모습을 보면 성선설이 맞는 것 같고, 깨어 울고 보채거나 무엇이든 제 입으로만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 성악설이 맞는 것도 같아 혼란스럽다. 그뿐만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는 법 없이도 살 것 같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 모습으로 돌변했다거나, 사랑으로 백년해로를 약속하고 잘 살던 부부가 어느새 서로를 원수라 부르기 시작하는 것도 우리의 판단을 유보하게 한다.
인성설(人性說)의 전형은 대체로 맹자1)의 성선설과 순자2)의 성악설로 집약된다. 여기에 선악혼효설(善惡混淆說)까지 보태면 3가지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인성설의 이해에 도움이 될 다음 두 가지 예화를 들어보기로 하자.
<1>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모델이 되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 마리아델레그라치에 성당 식당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벽화 ‘최후의 만찬에 얽힌 이야기다.
‘최후에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기 전날 밤 12제자들과 함께 가진 만찬으로, 《신약성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등에 그 기록이 전한다. 이때 그리스도는 자신을 배신하려는 제자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빵과 포도주를 축복한 뒤 성찬의식을 행하였다.
다빈치는 이 벽화를 부탁 받고 고민했다. 예수님까지 모두 13사람을 그리기 위해서는 13사람의 모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인공마다 성격이 다르고 그와 같은 인물을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모델이 문제였다. 예수님처럼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인물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예수님의 모델로 적격인 한 청년을 만났다. 다빈치는 전후사정을 이야기하며 부탁했고 그 청년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 청년을 모델로 예수님의 그림을 완성하고 한 숨을 돌리려는데 먼저보다 더 큰 고민이 생겼다.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유다’의 모델 때문이었다. 예수님과는 상대적인 사람을 골라야 했는데 그런 정도로 악해 보이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채 4년을 허송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감옥에는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로 나쁜 사람을 가두는 곳이니 그 곳에 가면 당신이 찾는 사람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타당성이 있었다. 마침 잘 아는 옥사장이 있어 부탁했다. 드디어 감옥을 둘러 볼 수는 있었지만 다빈치는 실망했다. 자신이 찾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 포기하려는 참인데 감방 한 쪽에서 적임자를 발견했다. 다행이었다. 반가운 나머지 앞뒤 생각 없이 그에게 유다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아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다빈치는 반성했다. 그림을 완성하려는 욕심 때문에 상대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주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곧 사과하고 부탁을 거두려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울음을 멈추더니 자신을 잘 살펴보라고 했다. 그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다빈치는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몇 해 전 예수님의 모델이 돼주었던 훌륭한 미모의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유다의 모델이 되어줄 것도 허락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다빈치는 그 청년을 모델로 예수님에 이어 유다의 모습까지 완성할 수 있었다. 1494년에 시작해서 1498까지 장장 5년에 걸쳐 완성한 다빈치의 이 그림이 명화로서 명성을 얻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다.
<2> 사람의 본성은 선도 악도 아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육조단경(六祖壇經)』 행유(行由)에 보이는 말씀이다.
혜능 스님께서 아직 후원에서 방아찧던 노행자(盧行者)로 계실 때다. 오조(五祖) 홍인(弘忍)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얻고 그 증표로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았다. 그러나 승가와의 연륜이 일천한 노행자가 법맥을 이은 것이 시기의 대상이 됨을 우려한 홍인 스님께서는 노행자에게 거처를 옮길 것을 명하셨다. 홍인 스님과 노행자는 밤을 도와 강에 이르렀다. 노행자와 같은 제자를 얻게 된 다행스러운 생각에 홍인 스님께서 직접 노를 저서 강을 건네주시며 남쪽으로 피신할 것을 지시하셨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안 대중은 홍인 스님께서 염려하신 대로 대중공사 후, 노행자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사품(四品) 장군을 지낸 바 있는 혜명(惠明)이란 스님을 중심으로 구성된 수 백인의 추격대가 뒤를 쫓았다. 석존의 가사와 발우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두 달 반이란 긴 시간의 도주와 추격 끝에 노행자는 대유령(大庾嶺)에서 혜명 상좌에게 잡히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노행자는 의발을 바위 위에 올려놓더니,
「이 의발은 믿음의 표시인데 감히 힘으로 다투겠단 말인가?」
라는 말을 남기고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혜명 상좌 역시 추격의 목적이 사람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의발을 되찾는 것이었기에 노행자는 내버려두고 의발을 집어 들고자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의발이 꿈적도 하지 않았다. 혜명 상좌는 놀라는 한편, 노행자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행자여, 나는 법을 위해 온 것이지 의발을 욕심내어 온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안 노행자는 덤불에서 나와 반석 위에 앉았다. 혜명 상좌는 노행자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
「원컨대 행자께서는 나를 위해서 법을 설하여 주소서.」
했다. 노행자가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법을 위해 왔다면 모든 인연을 쉬고 한 생각도 내지 말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하고 조금 있다가 혜명 상좌에게 말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럴 때 어떤 것이 혜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不思善하고 不思惡하라 正與麽時에 那箇是明上座의 本來面目고)」
하였다. ‘본래면목(本來面目)’3)이라는 말이 비로소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만 주제에 관한 내용은 여기까지다.
<3> 여름에는 파랗고, 겨울에는 하얗다.
사람의 마음이 본래 악한 것이라면 어찌 선해 질 수 있으며, 반대로 본래 선한 것이라면 어찌 악해 질 수 있겠는가. 주변의 환경이나 교육을 말하기도 하지만, 금을 흙으로 혹은, 흙을 금으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 한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악도 선도 아니기에 때에 따라 악하게도 되고 선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성공설(性空說)’이라는 신조어로 사람의 성품을 표현해 보기로 했다.
마침 초등하교 5학년 때 배운 동요 ‘파란마음 하얀마음’이 생각난다. 잠시 가사에 떠올려보면,
<1절>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에요 /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 파아란 하늘보고 자라니까요.
<2절>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에요 /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계절에 따라 또는 주위의 환경에 따라 그 빛이 변할 수 있는 것은 본래 파랗지도 하얗지도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본성은 그런 것이다. 불교의 입장을 굳이 말한다면 ‘성공설(性空說)’이라 하겠다.
만에 하나 성선설이나 성악설 가운데 어느 한쪽을 주장한다면 윤회의 길을 면치 못할 것이고, ‘성공설’을 진정 이해하였다면 열반의 문도 그리 멀리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若人欲識佛境界(약인욕식불경계) 누구라도 부처경계 짐작하길 바란다면
當淨其意如虛空(당정기의여허공) 당연할사 그마음을 허공같이 비울지니,
遠離妄想及諸趣(원리망상급제취) 망상이며 모든취향 멀리멀리 여의어서
令心所向皆無礙(영심소향개무애) 어디에도 걸릴바가 없어야만 하느니라.
혹, 혼란스런 나머지 선과 악이 함께 섞여 존재한다는 선악혼효설(善惡混淆說)에 솔깃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존재론적인 면에서 실재하는 하나의 법으로 본 것인바 소승 상좌부(上座部) 계통의 하나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주장하는 삼세실유법체항유론(三世實有法體恒有論)과 다르지 않아 대승의 공관(空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쯤에서 결론을 말해보자.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혼효설은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남을 위하고 나를 위함이 비록 작은 선(善)일 수는 있지만 이 모두가 윤회 가운데 나고 죽는 원인이니라(爲他爲己雖微善 皆是輪廻生死因)’고 하신 야운비구(野雲比丘)의 말씀처럼 생사의 원인이 된다.
이에 견주어 성공설은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뇌와 재액을 건넌다(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고 하신 『반야심경』의 말씀처럼 절대적인 것으로서 이에 순(順)함은 열반의 문으로 드는 것이 된다.
‘털끝만큼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진다(毫釐有差 天地懸隔)’고 했다. 귀찮고 골치 아프다고 피할 일이 아니다. 인성설에 관한 문제는 자신의 영원한 미래가 달린 문제다. 지금까지 열심히 말한 내용을 똘똘 뭉쳐보니 어느 절 주련(柱聯) 내용으로 압축된다.
摩訶大法王(마하대법왕) 우주처럼 광대해라 위대할사 법왕이여!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짧도않고 그렇다고 긴것또한 아니로다.
本來非皁白4)(본래비조백) 본래부터 검은것도 하얀것도 아니건만
隨處現靑黃(수처현청황) 곳에따라 푸르게도 누르게도 나타나네.5)
-주(註)-
1) 孟子(맹자) ; 372?-289?B.C. 중국 전국 시대의 철인(哲人).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도 하는데 확실치 않다. 공자의 도를 이어 제국을 순환하며 왕도(王道↔覇道) 정치와 인의(仁義)를 주장하였음. 서명(書名)『맹자(孟子)』는 맹자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모아 기록한 책이다. 성선설을 주장.
2) 荀子(순자) ; 340?-245?B.C. 중국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황(況) 또는 순경(盾卿)이라고 함. 맹자의 성선설에 대하여 성악설을 주장하여 그 사상을 책『순자(荀子)』를 발간함. 오늘날 전하여지는 것으로는 12권 32편을 당(唐)나라 양경(楊倞)이 20권으로 만들어 다시 그것에 주역(註譯)을 붙인 것임.
3) 本來面目(본래면목) ; 본래의 얼굴. 본래 자기의 모습. 인간의 진실 된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 깨달은 경지에서 나타나는 자연 그대로의 조금도 인위(人爲)를 더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심성을 말한다. 선종의 용어로 제6조 혜능 스님이 처음으로 한 말씀이다. 또, 본지풍광(本地風光) 혹은 본분사(本分事)․본분전지(本分田地)․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고도 함.
4) 조백(皁白) ; ①검은색과 흰색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②옳고 그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5)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서설(序說) 가운데 야보(冶父)의 송(頌)이다.
1) 孟子(맹자) ; 372?-289?B.C. 중국 전국 시대의 철인(哲人).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도 하는데 확실치 않다. 공자의 도를 이어 제국을 순환하며 왕도(王道↔覇道) 정치와 인의(仁義)를 주장하였음. 서명(書名)『맹자(孟子)』는 맹자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모아 기록한 책이다. 성선설을 주장.
2) 荀子(순자) ; 340?-245?B.C. 중국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황(況) 또는 순경(盾卿)이라고 함. 맹자의 성선설에 대하여 성악설을 주장하여 그 사상을 책『순자(荀子)』를 발간함. 오늘날 전하여지는 것으로는 12권 32편을 당(唐)나라 양경(楊倞)이 20권으로 만들어 다시 그것에 주역(註譯)을 붙인 것임.
3) 本來面目(본래면목) ; 본래의 얼굴. 본래 자기의 모습. 인간의 진실 된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 깨달은 경지에서 나타나는 자연 그대로의 조금도 인위(人爲)를 더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심성을 말한다. 선종의 용어로 제6조 혜능 스님이 처음으로 한 말씀이다. 또, 본지풍광(本地風光) 혹은 본분사(本分事)․본분전지(本分田地)․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고도 함.
4) 조백(皁白) ; ①검은색과 흰색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②옳고 그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5)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서설(序說) 가운데 야보(冶父)의 송(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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