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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각집‘욕심(慾心)’과 ‘원(願)’의 차이

최고관리자님    작성일2019-07-29 14:44:46    955    0
‘욕심(慾心)’과 ‘원(願)’의 차이

 

내용

【내용】 여행에는 목적지가 있다. 발 닿는 데로 하는 여행일지라도 최후의 목적지는 있게 마련이다. 목적지가 없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고 방랑이다. 인생도 그와 같아 여행 같은 삶과 방랑 같은 삶이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전자의 경우 그 목적지는 성불이고, 후자의 경우는 윤회의 연속일 뿐이다.

인생의 여정을 항해에 견준다면, 불철주야 노력하는 불자들의 수행은 노를 열심히 젓는 것이고, 부처님께 올리는 정성스런 축원은 자신이 처한 위치와 목적지를 확인하고 각오를 다지는 것이라 하겠다. 즉, 불교에서의 축원은 절대자를 향해 단순히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성취되기를 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책임지려는 일종의 점검이며 미래에 대한 지혜로운 기획(企劃)이요 다짐이라는 말이다.

제3조 승찬(僧璨) 선사의 「신심명(信心銘)」에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진다(毫釐有差 天地懸隔)’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여행과 방랑의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 차이가 있다. 원효 스님께서도 이 점을 중시 하셨기에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첫 대목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 이상세계인 적멸궁(寂滅宮)을 건립하실 수 있었던 것은 / 아주 오랜 세월(劫海) 동안 / 욕심을 버리고 고행하셨기 때문이요, / 그 많은 중생들이 / 고통의 세계를[火宅門]을 윤회함은 한량없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 욕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니라(夫諸佛諸佛 莊嚴寂滅宮 於多劫海 捨慾苦行 衆生衆生 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慾不捨).

049.jpg
고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은 욕(慾 욕심 욕)과 원(願 원할 원)의 차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을 말하는 것이지만 확연한 차이가 있다. 감별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구를 우선순위로 하는가에 달렸으니, 같은 염원이라도 자기 자신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욕심이고, 상대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원이다.

<1> 로켓의 구조와 닮은 축원(祝願)의 구조

당연한 일이거니와 불교에서는 원을 세우고 실천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부처님 전에서 아뢰는 축원의 내용을 보면, ‘수명장수(壽命長壽)’ ‘안과태평(安過太平)’ ‘부귀공명(富貴功名)’ 등 자신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둔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불교를 폄하하거나 우려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기복불교(祈福佛敎)’ 혹은 ‘구복불교(求福佛敎)’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폄하든 우려든 성급한 판단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축원 후미(後尾), 그러니까 ‘연후원(然後願. 지금껏 말씀드린 것에 이어 다시 원하옵나이다.)’을 필두로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지금껏 말씀드린 것에 이어 다시 원하옵나이다. /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세계의 / 한량없는 불자들이 / 모두 함께 연화장세계 장엄스런 바다에서 지내게 하시옵고, / 함께 진리의 전당에 들어 / 항상 화엄세계 불․보살님을 만나 뵙고 / 언제나 모든 부처님의 위대한 지혜광명을 입사와 / 한량없는 죄를 소멸하게 하옵시고, / 한량없는 큰 지혜를 얻게 하시와 / 문득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 널리 온 우주의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되어 / 모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고 / 어떤 세상을 만나든 항상 보살도를 행하여 / 마침내 일체의 지혜를 원만히 이루어 / 큰 지혜로 최상의 이상향인 저 언덕에 이르게 하여지이다(然後願 恒沙法界 無量佛子等 同遊華藏莊嚴海 同入菩提大道場 常逢華嚴佛菩薩 恒蒙諸佛大光明 消滅無量重罪障 獲得無量大智慧 頓成無上最正覺 廣度法界諸衆生 以報諸佛莫大恩 世世常行菩薩道 究竟圓成薩婆若 摩訶般若波羅蜜).
또는,
지금껏 말씀드린 것에 이어 다시 원하옵나이다. / 세간 속에 자리해도 걸림 없는 허공과 같고, / 더러움에 물 안 드는 연꽃과 같은 / 청정한 마음으로 최상의 이상향인 저 언덕에 태어나서, / 머리 숙여 더할 나위 없이 높으신 어른 부처님께 예를 올리옵도록 /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게 하여지이다(然後願 處世間 如虛空 如蓮花 不着水 心淸淨 超於彼 稽首禮 無上尊 摩訶般若波羅蜜).

등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앞서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에서 아뢰고 빌었던 내용들은 목적지인 성불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 설정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비유컨대 로켓에 탑재된 위성에 해당하는 ‘연후원’의 내용을, 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하면,

세존이시여! ⑴마음 가운데 구하는 바의 성취를 발원하오니 매일매일 천 가지 상서로운 경사가 있게 하시옵고, 언제나 백 가지 재앙은 없게 하시어, 목숨의 산은 높이 솟고, 복덕의 바다는 넓고 깊으며 가득하옵길 바라나이다. ⑵왜냐 하오면, 얻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얻었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사오니 어떻게든 당신께서 일러주신 대로 속히 성불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아울러 저만이 아니라 인연 있는 중생을 힘닿는 데까지 구제하고자 함이옵니다.

⑴의 내용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이 됐던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욕심’이다. 하지만 ⑴의 내용이 ⑵를 성취하기 위한 방편일 경우 같은 내용이라도 그것은 ‘원’으로 바뀌게 된다.

이쯤에서 불일보조(佛日普照) 국사께서 말씀하신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같은 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듯 지혜로운 배움은 깨달음을 이루고 어리석은 배움은 생사를 이룬다(所謂 蛇飮水成毒 牛飮水成乳 智學成菩提 愚學成生死).

<2>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

‘너 이다음에 커서 무엇이 되련?’ 어린 아이들을 보면 어른들이 습관처럼 하는 질문이다. 요즈음 애들은, ‘정규직이요’라고 대답한다는 우수개 소리도 있지만, 대체로 우위를 점하는 것이 법조인이나 의료인이다. 까닭을 물어보면 ‘힘없고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겠다’ 또는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살펴 주겠다’ 등을 이유로 든다.

요즈음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작 성인이 된 지금, 목적지를 상실한 채 대부분 다른 방향으로 가고는 있지만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고 나 또한 그랬다.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향산거사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조과도림(鳥窠道林. 741~824) 선사를 참방(參訪)하고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를 얻은 일화를 살펴 우리의 자화상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항주(杭州) 자사로 부임해 있던 백거이는 선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다. 듣던 대로 선사는 도량 한 쪽에 자리한 높은 소나무(長松) 위에 까치둥지 마냥 자리를 잡고 좌선 중이었다. 신기한 듯이 올려다보고 있는데 마침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는 흔들렸고 선사가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백거이는 부지중에,

“아 위험하다! 위험해!”하고 소리쳤다.

다급함을 알리는 사람소리에 선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관직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나무 밑에 서있는 게 보였다. 즉각 그가 곧 아만이 대단하다는 항주 자사 백거이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곧,

“아 위험하다! 위험해!”

선사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 앵무새처럼 말하였다. 그러자 백거이는,

“이 사람은 머리를 하늘에 두고 발은 이렇게 땅을 밟고 있거늘 도대체 무엇이 위험하다는 말씀이오?” 하고 반문했다.

“심화(心火)는 상교(相交)하고 식(識)은 허랑(虛浪)해서 정정(靜定)할줄 모르니 어찌 위험하지 않다는 말씀이요?”라고 했다. 선사의 말씀은 준엄했다. 백거이는 선사를 다뤄보려 했던 자신의 속내를 간파 당한 듯 하여 평소 당당했던 모습과는 달리 당황스러워 했다. 그리고는 내심으로 ‘과연 평범한 스님이 아니로구나’ 하고 슬쩍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불법의 대의를 간결히 말씀하면 어떤 것입니까(如何是佛法大意)?”

“나쁜 짓은 하지말고 좋은 일만 행하라는 것이외다(諸惡莫作 衆善奉行).”

선사의 이런 답변을 듣자, 백거이는 소리 높여 껄껄 웃었다.

“그거야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 아니요(三歲孩兒也解恁柚道)?”

하고 신통치 않다는 듯이 말하니, 선사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말했다.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외다(三歲孩兒雖道得 八十老人行不得).”

선사의 이 말씀은 비수처럼 백거이의 가슴을 파고들더니 아만의 정수리에 정확히 꽂혔다. 지(智)와 행(行)! 불법은 지혜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김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는 행지구비(行智具備)의 도리를 그는 여실히 깨달았다.

이리하여 그 자리에서 모든 아만심과 식견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도림선사께 귀의하고 열심히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는 백거이의 명시와 명문도 모두 선사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닦은 행지(行智)가 원만한 인격으로부터 울려나온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착하고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3살짜리 코흘리개도 아는 일이다. 그러나 로켓에 추진체(推進體)가 없으면 탑재한 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킬 수 없듯, 위성에 해당하는 ‘연후원’ 후(後)의 내용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추진체에 해당하는 앞의 내용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조타수(操舵手)가 키를 놓아서는 안 되듯 ‘연후원’ 후의 내용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며, 설혹 앞에 발원한 내용의 성취가 뜻과 같지 않더라도 그것조차도 수행의 자산으로 삼을 줄 아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규봉종밀(圭峰宗密) 선사’의 말씀이 새삼스럽다.

死生在呼吸(사생재호흡) 죽고 사는 것은 호흡에 달렸고 起滅若浮漚(기멸약부구) 일어나고 스러짐은 거품과도 같은 것이니, 無令方服下(무령방복하) 가사(袈裟)를 두르고 있으면서 飜作阿鼻由(번작아비유) 도리어 아비지옥의 원인을 짓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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