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자료
영산재발전을 위한 다양한 자료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문각집여시아문(如是我聞) -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

최고관리자님    작성일2018-09-03 10:40:20    1,189    0
여시아문(如是我聞) -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

 

내용

【요점】

불교에서는 대상을 인식하는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여 이를 ‘삼량(三量)’이라 한다. 외계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현량(現量), 이미 아는 사실을 가지고 비교해서 추리하는 비량(比量), 성인의 가르침이나 말씀을 의지하여 아는 성언량(聖言量)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초로인생(草露人生)과 같이 유사성 또는 동일성에 견주어 아는 비유량(譬喩量)을 더해 사량(四量)을 말하기도 한다.

인식의 방법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은, 이 글의 제목을 ‘여시아문’이라 한 것처럼, 필자가 연구한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들은바 이야기를 정리해서 전하는 것이기에 이 점을 분명히 해두려는 것이다.

내용인즉 한글창제에 관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한글 창제의 주인공은 집현전 학사들이 아니라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가 주인공이라는데 초점을 맞춘 이야기이다. 아직 공인되지는 않았으나 개연성이 충분하기로 소개드리고자 한다.

【내용】

<1> 신미대사(信眉大師)는 어떤 어른?

영산(永山) 김씨 가문의 사람으로 속명은 수성(守省)이다. 부친은 김훈(金訓)이며 태종3년에 충북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오얏골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생이면서 숭불(崇佛)을 주장했던 집현전 학사 김수온(金守溫)은 그의 둘째 아우이다. 대사는 기품과 학문이 모두 출중하였고, 성장하여 집현전 학사로 있었으나 벼슬보다 불법에 뜻이 있어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로 출가하여 수미(守眉)대사와 함께 수행하였다.

<2> 세종대왕(世宗大王)과의 인연

법주사 말사인 복천암(福泉庵)에 주석하고 있던 대사는 세종의 부름을 받아 적어도 7년 이상 복천암과 한양을 오가며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한글창제가 1443년 세종25년의 일이고, 반포는 1446년 세종28년의 일이었다.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불경의 원전인 범서(梵書)로 된 경전을 보기 위해 범어(梵語. Sanskrit)는 물론 팔리어, 티벳어 등을 연구하여 어학(語學)에 밝았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는 범어가 소리글로서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이루어진 점에 착안하여 소리글인 한글을 마무리 지었다. 해인사에서 『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에 토(吐)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이른바 실용성 여부에 관한 임상시험을 성공리에 끝냈다. 이런 결과를 보고 받은 세종은 매우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이렇게 탄생한 우리글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하여 반포하였다. 이어 우리글로 노래도 지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⑴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⑵ 등이 그것이다.

그 후 세종은 신미대사의 수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대사가 주석하고 있는 속리산 복천암에 주불이신 아미타불과 관음․세지 양대보살 등 삼존의 복각조성(復刻造成)에 대화주가 되었다.

성삼문, 정인지 등 유생들은 최초 한글창제의 발기를 주상(主上)이 하였으니 그 공을 주상에게 돌리자고 하였다. 무주상(無住相)의 도리를 아는 신미대사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쉽게 익히고 써서 그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 한 걸음 더 나가 수행과 성불에 도움만 될 수 있다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한글창제 관계문헌에는 신미대사에 대한 언급이 배제되었다. 오직 영산 김씨 족보에만 ‘집현원학사 득총어세종(集賢院學士 得寵於世宗. 집현원 학사로서 세종대왕의 총애를 얻었다)’이라 하여 그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3> 호사다마(好事多魔)

한편, 한글창제 전후가 세종에게는 개인적으로 비운이 겹친 때이기도 했다. 세종26년에 다섯째 왕자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고, 세종27년에 일곱째 왕자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잃었으며, 세종28년에는 소헌왕후(昭憲王后)마저 승하하였다. 이에 세종은 내원당(內願堂)을 짓고 이들의 왕생을 빌었고, 그 법요를 신미대사와 그의 동생인 김수온으로 하여금 주관토록 했다.

하지만 이런 충격을 이기지 못한 세종은 급기야 병환을 얻게 되었다. 문종(文宗)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세종을 지성으로 시탕(侍湯)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에 신미대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세종은 이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신미대사와 더욱 가까워 졌다. 장차 세조가 될 수양대군과의 친분도 이때 이미 돈독하였다.

후일, 세종은 병환이 위중한 가운데서도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 / 선종과 교종의 총수로서 온전히 정법을 전하고 자비와 지혜 두 가지를 운용하여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함에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혜각존자)’라는 긴 법호를 지어 신미선사께 사호(賜號)토록 문종에게 위임했다.

<4> 세조(世祖)의 복천암 행차

한글창제라는 대업을 마친 신미대사는 아무런 미련 없이 속리산 복천암으로 돌아갔다. 그 후, 세종의 보위를 문종이 이었으나 병약하여 일찍이 붕어하였다. 단종(端宗)이 12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수양에 의해 폐위 당하고 수양이 등극하였다.

조카를 몰아낸 세조의 마음도 편할 리가 없었다. 끊임없이 번민하다보니 고질적인 피부병까지 얻게 되었다. 요즘말로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것이다.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예전, 세종대왕의 시탕을 함께 했던 신미대사 뿐이라 생각하고, 복천암으로 거둥키로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조는 온양과 초정(椒井)에서의 목욕을 핑계 삼았지만 속리산 복천암 방문이 실제 목적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5> 정2품 소나무의 탄생

5백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어가 행렬은 청주에서 이틀을 머문 뒤, 충북 보은 말티재 밑 현, 대궐 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세조 10년 갑신 2월 28일 신해일, 말티재를 넘어 이등변삼각형의 우람한 소나무 밑을 지나는데 왕이 탄 연(輦. 가마)이 소나무 가지에 걸릴 것 같았다. 마침 이 광경을 본 왕이 다급한 나머지 ‘연이 걸리겠다. 연이 걸리겠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나무 가지가 저절로 올라가 연이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다. 왕이 이를 기특히 생각하고 정2품 벼슬을 내렸다.

발길을 재촉하여 정오에 복천암에 당도하니 신미대사를 비롯하여 당대의 대덕인 수미(守眉), 사지(斯智), 학조(學祖), 학열(學悅) 스님 등이 반가이 영접했다.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법문을 들었다. 사흘을 그렇게 보내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환궁하려는 세조에게 신미대사가 오대산 상원사 중대 적멸보궁의 복원에 대화주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세조는 흔쾌히 응하였고, 학열 대사가 도감(都監)의 소임을 맡았다.

<6> 세조의 상원사 적멸보궁(寂滅寶宮) 행차

세조의 적극적 후원으로 같은 해(세조 10년) 유월에 적멸보궁 복원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신미대사는 세조를 초청하였다. 세조는 흔쾌히 승낙하고 5백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참석하였다. 때는 유월 염천이었지만 낙성식도 낙성식이려니와 임금의 행차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세조 역시 왕으로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왕관을 쓰고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옥대(玉帶)까지 매고 있었다. 더위도 참기 어려운데 피부병의 고통까지 가중되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긴 하루가 지나고 드디어 날이 어두웠다. 그러나 2경(二更. 9~11시)이 되어도 밖의 소란함은 그치질 않았다. 세조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남아 있음을 염려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7> 문수보살을 친견한 세조

세조는 군사들을 멀리 물리고 혼자 개울 쪽을 향했다. 왕관과 옥대 등을 모두 벗어 개울 옆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찬물에 몸을 담갔다. 극락이 따로 없음을 느끼면서 지난 낮의 고통을 씻었다. 더위도 가시고 목욕도 웬만큼 한 것 같은데 등에 손이 닿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마침 그때 7~8세쯤 되어 보이는 동자가 나타났다. 세조는 동자에게 등을 좀 문질러 달라고 부탁했다. 동자가 다가와 조그만 손으로 등을 문지르는데 시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아직 철없는 아이인지라 혹시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댄 것을 말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당시 국법이 왕의 몸에 손을 대면 이유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동자에게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댔다는 말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랬더니 동자 역시 세조에게 당부할 것이 있다하였다. 그 내용인즉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너무 놀란 세조가 돌아보니 인홀불견(因忽不見)이었다. 성현과 같이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절로 올라갔다. 몸과 마음은 전에 없이 상쾌했다. 오랜만에 단 잠도 이룰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상처 하나 없이 몸이 다 나았다. 문수보살님의 가피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문수보살님께 무수히 감사하며, 화사(畵師)를 불러 간밤에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대로 조각하여 상원사 대방에 봉안토록 했다. 지금 상원사 대방에 모셔진 분이 바로 그분이시다. 이 일을 계기로 상원사 앞개울에 세조가 왕관과 옥대를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목욕한 곳을 ‘관대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8> 한글이 범어에서 유래된 증거

한글이 창제(1443)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에 집현전 실무 담당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이 한글의 반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처럼 반대하는 배경에는 훈민정음의 원리적 근거가 유교가 아닌 불교였기 때문이고, 그 주역이 신미대사였기 때문이다.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인 증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글창제 무렵 한글로 번역한 것들이 불교경전이라는 점이다.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가 그 대표적인 것이며, 소헌 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쓴 책 『석보상절(釋譜詳節)』⑶도 있다. 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석존의 공덕을 찬양하는 한글로 지은 노래다. 만일 한글이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논어』나 『맹자』 등 유교의 경전들을 먼저 번역하지 않았겠는가.

『월인석보』에 실린 세종의 어지(御旨)는 108자이고, 『훈민정음』은 28자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08은 번뇌의 수이고,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칠 때 그 횟수가 28번과 33번이다. 28과 33은 하늘의 28수(宿)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를 우연이라 할 것인가?! ‘신미 창제설’의 결정적인 근거는 신미대사가 당대 최고의 범어나 티벳어 등 어학의 전문가였고, 한글이 범어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에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사들은 한문에는 대가였지만 여타 외국어에 능하지는 않았다.

<9> 불교와 뗄 수 없는 인연

이로부터 5세기가 지난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이 운영하던 ‘하기 국어강습소’의 졸업생들과 국어 연구에 뜻을 둔 사람들이 김정진을 회장으로 ‘한국어 연구학회’를 창립하였다. 그런데 그 장소가 서울 신촌에 자리한 삼각산 봉원사(奉元寺)다. 학회 회원들은 1926년 한글날을 제정했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었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최현배, 이희승 등 학회 회원 33인이 일제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초를 당했다. 재판 도중 이윤재, 한징 두 분은 고문으로 옥중에서 돌아가기까지 했다. 이렇듯 목숨을 바쳐 지켜왔고 지켜가야 할 우리민족의 얼이 담긴 우리글이다.

2008년 8월 31일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회원들은 봉원사 사부대중의 박수 속에 처음 학회를 창립한 자리에 표지석을 세웠다. 누구보다도 신미대사께서 대견해 하실 일을 한 것이다.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삼량(三量) 가운데 성언량(聖言量)이 있다. 성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한국세종한림원 총재 강상원(1938~) 박사의 연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작성했거니와 만에 하나 왜곡되었거나 잘못 전달된 부분이 있다면 필자의 몫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한글! 세계의 여러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글임을 인정받은 우리글이다. 국가의 주권을 되찾은 지도 어언 8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일제의 상흔도 많이 아물고 그만큼 모든 것이 제 자리와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이제 한글이 누구에 의해 창제되었는지도 바로 알고 또 알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한글을 창제하신 신미대사! 불자로서 자긍심과 사명감이 절로 생긴다.



-주(註)-

⑴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조선 세종 31년(1449)에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노래를 실은 책. ≪월인석보≫에 따르면 500여 수의 노래로 추정되나 그 일부만을 알 따름이고 오늘날은 상권(上卷) 한 권만 전한다. 전해지는 책은 보물 제320호로 정식 명칭은 ‘월인천강지곡 권상(月印千江之曲卷上)’이다.

⑵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조선 세종 27년(1445)에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지어 세종 29년(1447)에 간행한 악장의 하나.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으로, 조선을 세우기까지 목조ㆍ익조ㆍ도조ㆍ환조ㆍ태조ㆍ태종의 사적(事跡)을 중국 고사(古事)에 비유하여 그 공덕을 기리어 지은 노래이다. 각 사적의 기술에 앞서 우리말 노래를 먼저 싣고 그에 대한 한역시를 뒤에 붙였다. 125장. 10권 5책.

⑶석보상절(釋譜詳節) : 조선 세종 28년(1446)에 수양 대군이 세종의 명에 따라 소헌 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쓴 책으로 세종 29년에서 31년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 도선의 ≪석가씨보(釋迦氏譜)≫, 양나라 승우(僧祐)의 ≪석가보(釋迦譜)≫, 법화경, 지장경(地藏經), 아미타경, 약사경 등에서 뽑아 한글로 풀이한 석가모니의 일대기로, 조선 초기 국어 국문학의 귀중한 자료이다. 7책. 보물 제523호.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폴라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텔레그램 보내기
  • 텀블러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컨텐츠 목록
제목 조회 날짜
문각집 [산사의 편지 Ⅴ]
최고관리자    99
99 08-26
문각집 [산사의 편지 Ⅳ]
최고관리자    94
94 08-26
조어 신조어 * 마지고대 * 육화반 * 장수잡채 * 참회병 * 사라화
최고관리자    500
500 08-03
문각집 [산사의 편지 III]
최고관리자    300
300 07-04
문각집 [산사의 편지 II]
최고관리자    237
237 07-04
문각집 [산사의 편지 I]
최고관리자    292
292 06-25
문각집 세시법문(歲時法門) II
최고관리자    278
278 07-31
문각집 세시법문Ⅰ
최고관리자    308
308 07-31
문각집 세모에 되새겨보는 ‘삼법인(三法印)’ - 유종의 미 -
최고관리자    313
313 12-28
문각집 너 자신을 알라 – 우리의 현주소 ‘사바세계’ -
최고관리자    881
881 10-15
문각집 하심(下心)
최고관리자    365
365 07-21
문각집 참회(懺悔)와 절개(節槪)
최고관리자    395
395 05-18
문각집 <대비주>와 『반야심경』의 어울림
최고관리자    441
441 03-25
성보 탄생상봉안불감(誕生像奉安佛龕)
최고관리자    341
341 01-08
문각집 방하착(放下着) -보살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있다-
최고관리자    621
621 11-07